무난한 하루 -
때로는 놀라울 만큼 깊이 몰두할 때가 있다.
무언가에 마음이 붙잡히면 시간의 흐름조차 잊은 채, 한 겹, 두 겹, 끝도 없이 안으로 파고든다.
누가 불러도 들리지 않고, 배가 고픈 줄도 모르고, 목이 마른 줄도 모른다.
그 순간의 나는 무언가를 하는 사람이 아니라, 몰입 그 자체가 된다.
글을 쓰든, 그림을 그리든, 정말 재미있는 무언가를 하든, 세상은 어느새 사라지고, 오직 나와 그것만 남는다.
그렇게 시간을 보내고 나면 시계를 보는 순간 깜짝 놀랄 때가 있다.
어느새 자정을 훌쩍 넘겨 새벽을 향해 가는 때들이 있기 때문이다.
그 시간만큼은 이상하게도 피곤함조차 느껴지지 않는다.
오히려 마음은 충만하고, 무언가를 해냈다는 뿌듯함으로 가득 차 있다.
하지만 그 기세는 오래가지 않는다.
다음 날이면 몸은 납처럼 무거워지고, 정신은 흔들리며, 머릿속에는 안개가 내려앉은 것처럼 생각마저 느려진다.
평소라면 금방 끝냈을 일도 몇 배의 시간이 걸리고,
의욕은 있는데 몸이 따라오지 않는다.
그제야 깨닫는다.
아, 나는 로봇이 아니라 사람이었구나.
그리고 다음 날이면 일도 평소만큼 해내지 못한 채, 거의 쉬다시피 하게 되는 날도 있다.
깊은 몰입이 남기고 간 달콤한 후유증이다.
예전에는 그런 몰입의 시간이 많을수록 더 좋은 삶이라고 생각했다.
한계를 넘어서까지 집중하는 사람이 더 멋진 사람이라고 믿었던 것 같다.
하지만 이제는 조금 다른 마음이 든다.
적당한 힘으로 일하고, 적당한 에너지로 살아낸 하루.
무리하지 않았지만 해야 할 일을 해냈고, 웃을 일도 있었고, 쉬는 시간도 있었고,
좋아하는 일도 적당히 하고, 잠도 충분히 잤던 하루.
그런 평범한 하루가 생각보다 훨씬 귀한 것이었다.
회사에서도 전력을 다해 달리다 번아웃을 좀겪었던 나는,
이제는 모든 사람이 나를 찾는 사람이기보다, 필요한 순간에 적당히 찾는 사람인 것이
사실은 더 오래 일할 수 있는 방법이라는 것을 조금씩 배우고 있다.
무난하게 흘러간 하루.
별일 없이 지나간 하루.
예전에는 조금 심심하다고 생각했던 그런 날들이, 돌아보면 내게는 가장 건강한 하루였고,
가장 오래 지속할 수 있는 하루였으며, 내 삶을 가장 안정적으로 지탱해 준 소중한 하루들이었다.
생각해 보면,
강렬함은 가끔이기에 강렬하고,
폭죽은 순간 터져 오르기에 사람들의 시선을 붙잡는다.
하지만 우리를 끝내 살아가게 하는 것은,
매일 저녁 묵묵히 제자리를 지키며 따뜻하게 켜져 있는 등 하나다.
화려하지는 않지만, 언제나 그 자리에 있어 우리에게 길을 보여 주고,
늦은 밤에도 조용히 마음을 쉬게 해 준다.
새벽을 환하게 밝히는 눈부신 폭죽의 불꽃도 좋지만,
나는 이제 고요한 저녁을 은은하게 비추며,
잠잘 시간까지 묵묵히 꺼지지 않는 등을,
예전보다 훨씬 더 사랑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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