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굴 없는 사장님과 11박 12일

바다 위의 색

by문성

《얼굴 없는 사장님과 11박 12일》

9화. 바다 위의 색

일출을 보고 함께 아침을 먹은 뒤, 도윤은 에블린과 헤어져 객실로 돌아왔다.

오늘만큼은 회사 생각을 하지 않겠다고 마음먹었다. 그런데 문을 닫자마자 휴대전화가 울렸다. 화면에는 세림무역 해외영업팀장의 이름이 떠 있었다.

도윤은 한숨을 작게 내쉬고 전화를 받았다.

“강 대리, 지금 통화 괜찮지?”

“네, 팀장님.”

“휴가 중인 건 아는데 원단 건은 더 미룰 수가 없어. 유럽 쪽에서 색상 승인을 아직 안 했어. 네가 마지막으로 샘플 확인했으니까 네가 처리해.”

도윤은 옷장 안쪽을 열었다. 안에는 출항 전 팀장이 건네준 납작한 서류 봉투가 있었다. 휴가를 떠나기 직전, 팀장은 환불 불가인 크루즈를 취소하지 말고 그 안에서 업무를 처리하라고 했다. 유럽 패션업체에 보낼 원단 샘플의 승인 문제가 급했고, 동남아 거래처와 오래 연락해온 사람이 도윤뿐이라는 이유였다.

“팀장님, 그래도 제가 휴가 중인데요.”

“알지. 그런데 크루즈 취소 수수료가 너무 크잖아. 어차피 배에 타는 김에 메일 확인하고, 그리스 도착하면 거래처 담당자와 한 번만 만나. 네가 맡은 건이니까 마지막까지 바카라임져야지.”

‘어차피 배에 타는 김에.’

도윤은 그 말을 들을 때마다 어쩔 수 없이 웃음이 났다. 휴가는 취소할 수 없었고, 회사는 그 취소할 수 없는 휴가에 업무를 얹었다.

“샘플 색상 비교 자료를 보내드리겠습니다.”

“그래. 점심 전까지 부탁해.”

통화가 끝났다. 도윤은 서류 봉투에서 작은 원단 조각들이 붙은 샘플 북을 꺼냈다. 베이지색과 회색 사이의 색들이 나란히 붙어 있었다. 언뜻 보면 비슷했지만, 거래처는 그중 한 가지 색만 승인하지 않고 있었다.

‘햇빛 아래서 보면 다를까?’

그는 샘플 북을 들고 객실을 나왔다. 갑판으로 향하는 복도에서 에블린과 마주쳤다. 그녀는 손에 차가 든 컵을 들고 있었다.

“어디 가세요?”

“잠깐 업무를 보려고요.”

에블린은 샘플 북을 보고 눈썹을 올렸다.

“휴가 중에도 결국 회사가 따라왔네요.”

“회사 쪽에서 저를 따라온 건지, 제가 회사 일을 가지고 온 건지 모르겠습니다.”

“둘 다일 것 같은데요.”

“정확합니다.”

에블린은 샘플 북을 가리켰다.

“그게 원단이에요?”

“네. 세림무역에서 유럽 패션업체에 납품하려는 원단입니다. 색상 승인이 안 나서요.”

그녀의 표정이 조금 달라졌다.

“제가 잠깐 봐도 될까요?”

“원단을 잘 아세요?”

“패션잡지를 만들잖아요. 좋은 옷을 만드는 사람들을 만나고, 소재와 색을 보는 일도 제 일이에요.”

도윤은 샘플 북을 건넸다. 에블린은 조각들을 하나씩 살펴봤다. 객실 복도 조명 아래에서는 색 차이가 뚜렷하지 않았다.

“어디서 비교하셨어요?”

“사무실 조명 아래서요. 거래처가 보낸 사진도 실내에서 찍은 거고요.”

에블린은 샘플 북을 닫았다.

“그럼 햇빛 아래서 봐야겠네요. 원단은 조명에 따라 색이 꽤 달라 보여요.”

도윤은 그녀를 따라 갑판으로 나왔다. 햇빛은 아침보다 밝아졌고, 바다 위에는 작은 물결들이 반짝였다. 에블린은 샘플 북을 난간 옆 그늘에 두었다가 다시 햇빛 쪽으로 옮겼다.

“여기서는 따뜻한 베이지로 보이고, 햇빛에 비추면 회색이 조금 더 보여요.”

도윤도 두 조각을 번갈아 살폈다. 거래처가 승인하지 않은 색은 실내에서 볼 때보다 훨씬 차갑게 보였다.

“아마 그 차이 때문인가 봅니다. 사진으로는 색이 제대로 안 잡혔겠네요.”

“가능성이 있어요. 원단을 창가에서 찍은 사진도 같이 보내보세요. 그리고 실제 색상 번호를 다시 확인하고요.”

도윤은 휴대전화로 샘플 북 사진을 찍었다. 햇빛 아래에서 찍은 사진과 그늘에서 찍은 사진을 나란히 저장했다. 색상 번호가 적힌 작은 라벨도 가까이 찍었다.

“이제 팀장님께 보내면 되겠네요.”

“도움이 됐다면 다행이에요.”

“덕분에 오늘 안에 해결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도윤은 팀장에게 사진과 간단한 설명을 보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답장이 왔다.

‘확인했다. 이 사진으로 거래처에 다시 전달해볼게. 그리스 도착하면 담당자와 일정 잡아라.’

도윤은 답장을 읽고 휴대전화를 내려놓았다.

“일은 끝났어요?”

“오늘 해야 할 건 끝났습니다.”

“그럼 이제 휴가를 보내도 되겠네요.”

“그렇죠.”

“좋아요. 아침에 같이 걷기로 했으니까 산바카라하러 가요.”

에블린은 먼저 걸음을 옮겼다. 도윤은 샘플 북을 서류 봉투에 넣어 가방에 보관한 뒤 그녀를 따라갔다.

갑판의 산바카라로에는 사람들이 많지 않았다. 난간 너머로 바다가 이어졌고, 배가 지나온 자리에는 하얀 물거품이 길게 남아 있었다.

“원단은 다 해결될 것 같아요?”

에블린이 물었다.

“사진만으로 승인되면 좋겠지만, 거래처가 실제로 보고 싶어 할 수도 있습니다.”

“그리스에서 만나기로 했어요?”

“네. 도착하면 담당자를 만나기로 했습니다.”

“그럼 크루즈 여행은 결국 출장도 되는 거네요.”

“회사 입장에서는 그렇습니다. 제 입장에서는 휴가에 출장 업무가 끼어든 거고요.”

“억울하겠어요.”

“조금요. 그래도 에블린 씨가 색을 봐줘서 빨리 끝났습니다.”

“저도 원단 이야기는 재미있었어요. 오늘은 사장님이 아니라 잡지 만드는 사람으로 도움을 준 셈이네요.”

“저는 오늘 회사 대리가 아니라 여행객으로 산바카라하면 되겠군요.”

“네. 그게 오늘 제일 중요한 업무예요.”

“휴가에도 업무가 있습니까?”

“도윤 씨가 휴가를 제대로 보내는지 제가 확인하는 일이요.”

“그 업무는 누가 지시했습니까?”

“제가요.”

“그럼 이의 신청은 어디에 하면 되죠?”

“접수하지 않을 거예요.”

“규정이 불공정하네요.”

“대신 산바카라이 끝나면 커피를 사드릴게요.”

“그럼 이의 신청을 취소하겠습니다.”

두 사람은 웃으며 선내 카페로 향했다. 커피를 기다리는 동안, 에블린은 갑판에서 찍었던 원단 사진을 다시 보여달라고 했다.

“이 사진은 색이 잘 보이네요. 보정은 하지 마세요.”

“회사 보고용이니 있는 그대로 보내야죠.”

“그 말은 믿음직스럽네요.”

“그럼 제 휴가도 믿고 맡기실 수 있습니까?”

“그건 아직 판단 중이에요.”

“평가 기준이 뭡니까?”

“오늘 남은 시간 동안 일을 한 번도 더 하지 않는 것.”

도윤은 휴대전화를 뒤집어 테이블 위에 놓았다.

“그럼 지금부터는 휴가에 집중하겠습니다.”

에블린은 그가 휴대전화에서 손을 떼는 것을 확인하고서야 커피를 건넸다.

“좋아요. 오늘은 합격이에요.”

“아직 하루가 끝나지 않았습니다.”

“그럼 남은 시간도 지켜볼게요.”

창밖으로 바다가 천천히 흘러갔다. 서류 봉투 안에는 유럽으로 보낼 원단 샘플이 있었고, 테이블 위에는 두 잔의 커피가 놓여 있었다.

도윤은 잠깐 그 둘을 바라보다가 생각했다.

회사 때문에 크루즈를 취소할 수 없게 된 일은 분명 억울했다. 하지만 그 일 덕분에 지금 에블린과 같은 테이블에 앉아 있다는 사실까지 억울해할 수는 없었다.

“도윤 씨?”

“네?”

“커피 식겠어요.”

“아, 그러네요.”

도윤은 커피를 들었다. 에블린은 창밖 바다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의 옆얼굴에는 아침 햇빛이 부드럽게 내려앉았다.

그날 오후, 도윤은 회사에 원단 사진을 보내고도 한동안 그 파일을 지우지 못했다. 햇빛 아래서 달라 보이던 색과, 그 사진을 함께 들여다보던 에블린의 표정이 자꾸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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