휴가의규칙
《얼굴 없는 사장님과 11박 12일》
10화. 휴가의 규칙
점심 무렵, 선내 방송에서 그날 밤 갑판에서 열릴 ‘화이트 나이트’를 안내했다. 승객들은 흰색 옷을 입고 야외 무대의 음악과 춤을 즐길 수 있다고 했다.
도윤은 식당 입구에 붙은 안내문을 읽고는 고개를 갸웃했다.
“흰색 옷을 입어야 하는 행사인가 보네요.”
“꼭 흰색만 입어야 하는 건 아니에요. 분위기에 맞춰 입으면 되죠.”
에블린이 그의 옆에서 안내문을 읽었다.
“도윤 씨는 흰 옷 있어요?”
“셔츠는 있습니다. 다만 흰색인지 아이보리색인지는 조명에 따라 달라집니다.”
“원단 샘플을 너무 오래 봐서 색이 헷갈리는 것 아니에요?”
“그럴 수도 있겠네요.”
“저녁에 입을 옷을 한번 확인해봐요. 제가 봐드릴게요.”
“원단 색상도 봐주시고, 이제 옷까지 봐주시는 겁니까?”
“제가 패션잡지 사장이잖아요.”
“그 사실을 이렇게 유용하게 쓰실 줄은 몰랐습니다.”
에블린은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저녁 일곱 시에 로비에서 만나요. 옷을 보고 정하는 건 그때 해요.”
도윤은 객실로 돌아가 옷장을 열었다. 흰 셔츠와 밝은색 면바지, 그리고 선장 만찬 때 입었던 재킷이 걸려 있었다. 셔츠는 잘 다려져 있었지만, 어디에나 있는 평범한 옷이었다. 그는 한참을 바라보다가 결국 셔츠와 바지를 침대 위에 놓았다.
저녁 일곱 시, 로비에서 만난 에블린은 흰색 리넨 재킷을 걸치고 있었다. 그녀의 옷은 단정했지만 지나치게 꾸민 느낌은 없었다. 깃에는 페낭에서 산 은색 별 브로치가 작게 반짝였다.
“오늘도 별을 달았네요.”
“여행 내내 달고 다니려고요.”
“그럼 그 브로치도 이번 여행의 기념품이 되겠네요.”
“이미 기념품이에요. 오늘은 그 기념품을 달고 나왔을 뿐이죠.”
두 사람은 도윤의 객실로 향했다. 에블린은 침대 위에 놓인 셔츠와 바지를 살펴봤다.
“이 조합이면 괜찮아요. 셔츠 소매를 조금 걷고, 단추는 위에 하나 풀어요.”
“그 정도로 달라집니까?”
“옷은 작은 차이로 분위기가 바뀌어요.”
“회사에서는 단추를 풀면 단정하지 않다고 할 텐데요.”
“오늘은 회사에 보여줄 옷이 아니잖아요.”
도윤은 셔츠를 갈아입고 소매를 걷었다. 에블린은 한 걸음 물러서서 그를 살펴보았다.
“어때요?”
“생각보다 괜찮네요.”
“그러니까 제가 괜찮다고 했잖아요.”
“이제 출근할 때도 이렇게 입으면 되겠습니까?”
“회사에서 이 차림으로 가면 팀장님이 놀라시겠죠.”
“그럼 휴가 때만 입겠습니다.”
“좋아요. 휴가 때 도윤 씨 옷은 제가 봐드릴게요.”
“그건 규칙입니까?”
“오늘부터요.”
갑판은 흰 조명과 작은 전구들로 꾸며져 있었다. 바람이 불 때마다 천장에 매달린 장식이 흔들렸고, 무대에서는 경쾌한 음악이 흘러나왔다. 승객들은 흰색 옷을 입고 삼삼오오 모여 있었다.
에블린과 도윤은 음료를 받아 난간 근처에 자리를 잡았다. 바다 위로는 배의 불빛이 길게 비쳤다.
“생각보다 사람이 많네요.”
도윤이 말했다.
“춤추는 건 좋아해요?”
“지난번 만찬에서 제 실력을 보셨잖아요.”
“그날은 실력보다 열정이 더 기억에 남았어요.”
“발을 밟은 횟수도 기억나십니까?”
“세다가 포기했죠.”
도윤은 주변에서 춤추는 사람들을 바라봤다. 에블린이 먼저 손을 내밀었다.
“오늘은 발을 밟지 않도록 천천히 춰봐요.”
“제가 잘 못 추면요?”
“그때는 제가 방향을 알려드릴게요.”
“나침반처럼요?”
“오늘은 제가 나침반이에요.”
그는 그녀의 손을 잡았다. 이번에는 지난번보다 조금 나았다. 도윤은 음악의 박자를 세며 에블린의 움직임을 따라갔다. 두 사람은 천천히 한 바퀴 돌았다. 가까워졌다가 다시 조금 멀어졌다. 도윤의 발이 에블린의 구두에 닿을 뻔했지만, 그녀가 재빨리 몸을 돌려 피했다.
“이번에는 안 밟았네요.”
“많이 발전했죠?”
“네. 이제 두 번 정도만 더 연습하면 세지 않아도 될 것 같아요.”
“그건 칭찬입니까?”
“여행 중에는 좋은 쪽으로 받아들이기로 했잖아요.”
도윤은 웃으며 그녀를 따라 천천히 발을 움직였다. 곡이 끝나자 에블린은 손을 놓지 않은 채 잠시 그대로 서 있었다. 음악이 바뀌고 사람들이 다시 춤을 추기 시작한 뒤에야 두 사람은 무대에서 내려왔다.
“오늘은 합격인가요?”
도윤이 물었다.
“오늘의 휴가 규칙을 잘 지켰으니까요.”
“그 규칙이 뭔데요?”
“회사 생각을 잠깐 내려놓고, 행사도 즐기고, 춤도 춘 것.”
“춤은 제가 잘 춘 게 아니라 에블린 씨가 방향을 알려준 덕분입니다.”
“그럼 다음에도 제가 알려주면 되겠네요.”
두 사람은 난간 쪽으로 걸어갔다. 바람이 조금 차가워져 에블린은 팔짱을 끼듯 양팔을 감쌌다. 도윤은 재킷을 벗어 건넬까 잠깐 고민했다. 그러나 그녀가 먼저 말했다.
“이번에는 재킷을 빌려주지 않아도 돼요. 춥지 않아요.”
“제가 묻기도 전에 아셨네요.”
“표정에 다 쓰여 있었어요.”
“또 표정입니까?”
“도윤 씨는 생각보다 얼굴에 마음이 잘 드러나요.”
그 말에 도윤은 잠시 입을 다물었다. 음악과 웃음소리가 멀리서 들려왔고, 배는 어두운 바다를 가르며 나아갔다.
“그리스에 도착하면 회사 거래처를 만나야 해요.”
도윤이 말했다.
“원단 때문이죠?”
“네. 업무가 잘 끝나면 그때부터는 정말 휴가가 될 겁니다.”
“그럼 약속을 하나 더 해요.”
“무슨 약속이요?”
“거래처를 만나고 나면, 그날 오후는 일 이야기를 하지 않기.”
“그리스에서도요?”
“그리스에서도요.”
도윤은 잠시 생각하는 듯하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좋습니다. 대신 그리스에서는 제가 길을 정해볼게요.”
“나침반이 있는데 길을 정할 필요가 있나요?”
“나침반은 방향만 알려주니까요. 어디로 갈지는 제가 정해야죠.”
에블린은 그 말을 듣고 천천히 웃었다.
“그럼 그리스에서는 도윤 씨가 길잡이네요.”
“제가 길을 잘못 들면요?”
“그때는 제가 옆에서 같이 길을 찾으면 되죠.”
밤이 깊어지자 음악이 잦아들었다. 두 사람은 로비까지 함께 걸었다. 에블린은 객실로 향하기 전 한 번 돌아서서 말했다.
“오늘은 정말 휴가 같았어요.”
“저도요.”
“내일도 규칙을 지켜요. 회사 메일은 정해진 시간에만 확인하기.”
“그런 규칙도 있었습니까?”
“방금 추가했어요.”
“규칙이 점점 많아지는군요.”
“불만 있나요?”
“없습니다. 다만 휴가가 끝날 때까지 규칙을 다 기억할 수 있을지 모르겠네요.”
“제가 매일 확인해드릴게요.”
에블린은 웃으며 객실 쪽으로 걸어갔다. 도윤은 그녀가 복도 모퉁이를 돌아 사라질 때까지 그 자리에 서 있었다.
그리스까지는 아직 며칠이 남아 있었다. 그동안 회사의 일도, 바다 위의 시간도 계속될 것이다. 하지만 이제 도윤에게는 그리스에서 에블린과 함께 걸을 오후 하나가 약속으로 남아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