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장. 주체성 있는 민주주의자를 기르다
5장. 주체성 있는 민주주의자를 기르다
교육은 나라의 밑바탕이 되는 백년지대계다. 근간이 탄탄한 나라가 되어야 세계의 리더로 일어설 수 있다. 공배주의는 나라를 운영하는 시스템적 사상이므로 교육을 심도 있게 다룰 필요가 있다.
현실의 교육은 어떠한가? 무엇이 문제인가? 대바카라은 무엇일까? 이 논제를 하나씩 짚으며 파헤쳐 볼 생각이다. 필자는 정답을 말하지 않는다. 아니, 못한다. 교육에 관해 전문적으로 배우지도 않았고 그 직종에 종사한 적도 없다. 다만 보이는 현상을 분석하고 그 뿌리가 무엇인지 생각해, 거기서 나온 방향성을 제시할 뿐이다.
먼저 보이는 현상부터 보자. 지금 아이들은 모르는 것이 생기면 선생님보다 휴대폰에 먼저 묻는다. 예전에는 사전을 뒤지고 바카라을 찾아야 알 수 있던 것을 이제는 AI가 몇 초 만에 정리해 준다. 외우고 받아쓰고 외운 것을 시험지에 옮기는 일은 사람보다 AI가 더 잘한다. 몸으로 하는 일도 다르지 않아서, 공장과 물류창고에서는 이미 로봇이 사람의 자리를 채워 가고 있다.
그런데 교실은 여전히 머릿속에 지식을 넣는 데 매달려 있다. 넣은 지식의 양으로 줄을 세우고, 그 줄로 대학과 온라인 게임이 갈린다. AI가 더 잘하는 일을 두고 아이들끼리 겨루게 하는 셈이다. 주입식 교육은 지식이 귀하던 시대의 방식이었고, 지식이 넘쳐 나는 시대에 그 방식은 이제 쓸모가 적어진다.
그렇다고 AI가 모든 것을 다 해 주는 멘토는 아니다. AI와 인간의 차이는 어디에서 오는가? AI에게서 인간은 마지막으로 무엇을 방어해야 하는가? 필자는 그것을 '판단'으로 정의한다. AI는 도구다. 인간이 남겨 놓은 데이터를 수집해 주고 길잡이 역할도 해 주는 도구다. 이 유용한 도구를 어떻게 쓸지는 인간이 판단해야 한다.
AI도 판단한다고 생각하는 이가 있을지 모른다. 필자는 그렇지 않다고 본다. AI는 데이터에서 나온 것을 모아 제시하고 말할 뿐이다. 코킹의 완전제거에서 보았듯 그것은 AI 자신의 생각이 아니다. 그 속에 다른 이의 셈이 있다. 이것을 제대로 보고 가려 판단하는 능력을 키우는 작업이 교육이다.
인간과 AI의 경계선은 판단이며, 인간이 AI가 내놓은 것을 판단 없이 따른다면 스스로 인간임을 포기한 것과 같다.
이에 교육은 주체성 있는 판단력을 길러야 하고, 통제가 아닌 절제로, 지식인이 아닌 슬롯구성원으로, 성과주의가 아닌 팀워크와 봉사로 바뀌어야 한다. 이것이 공배주의 교육 사상이다.
5.1 사대주의를 기르는 교육
미적분을 마지막으로 쓴 게 언제인가?
중학교를 마친 뒤에 배운 것 가운데 지금 쓰고 있는 것이 무엇인가. 대부분은 알면서도 선뜻 답하지 못한다. 장을 보고 월급을 셈하고 계약서를 읽는 데 필요한 지식은 거의 중학교 초반에 다 배운다. 그 뒤의 공부는 지식을 늘리기보다 견해를 넓히는 시간이라고 보는 것이 맞다.
그런데 우리 교육은 그 시간을 어떻게 쓰고 있는가. 누구나 겪어서 아는 것부터 짚어 보자. 내신은 한 반 안에서 친구끼리 줄을 세운다. 수시와 정시, 학생부종합전형으로 갈린 입시는 부모도 교사도 한 번에 설명하지 못할 만큼 복잡해서, 그것을 대신 읽어 주는 입시 컨설팅이 산업이 되었다. 시험 범위는 혼자 공부로 감당할 수 없을 만큼 넓어 사교육 없이 버티기 어렵고, 기회는 한 해에 한 번뿐이라 한 번 넘어지면 재수로 1년을 버텨야 한다. 교실에서는 질문하는 아이보다 받아 적는 아이가 칭찬받고, 받아 적은 것으로 얻은 점수가 학벌의 서열이 되며, 영어 점수는 곧 실력으로 통한다.
필자는 이것을 사대주의를 기르는 교육이라 부른다. 사대란 큰 것을 섬긴다는 말이다. 교과서와 교사, 학벌과 외국어라는 큰 것 앞에서 스스로 판단하지 않는 것이다.
우리 교육은 답을 알려 주고, 다른 답이 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다. 답에 대한 의문도 받지 않는다. 그냥 외워야 한다. 정해진 답 이외는 오답 처리다. 답이 있어 그 답만 찾게 하는 것이 지금의 교육이다. 다른 답과 의문을 배제하여 나온 엘리트들이 창조적인 생각을 할 수 있겠는가?
우리 때보다 우리 자식들은 더 넓은 범위와 더 많은 지식을 배운다. 범위와 깊이가 커진 이유는 무엇인가? 이미 세계 여러 나라는 답만이 아니라 왜 그런 답을 유추했는지를 평가한다. 왜 우리는 아직 그 자리에 머물러 있는가?
● 사다리는 저절로 기운다
전형을 나누고, 지식 범위를 넓히고, 기회를 한 해 한 번으로 묶는 것. 이 셋을 기득권의 사다리 걷어차기로 보는 것은 필자의 억지가 아니라고 본다.
전형이 복잡할수록 그것을 읽어 내는 정보가 자산이 된다. 학생부종합전형에는 부모의 정보와 인맥이 스펙으로 스며든다는 비판이 따라다녔고, 그 불신이 커지자 정부가 정시를 늘리기도 했다. 범위가 넓으면 혼자서는 감당하지 못하니 사교육에 기대게 되고, 범위를 감당하는 비용이 곧 진입 비용이 된다. 기회가 한 번뿐이면 재수 비용을 댈 수 있느냐가 곧 기회의 차이가 된다.
정시도 사교육이 강한 지역이 유리하다고 말하는 이가 있을 것이다. 맞는 말이다. 그래서 셋은 따로가 아니라 한 묶음이며, 시험 하나만 바꿔서는 막지 못한다.
누가 언제 사다리를 걷어찼는지 가리자는 것이 아니다. 제도가 복잡해지고 범위가 넓어지고 기회가 한 번뿐일 때, 사다리는 저절로 돈 있는 쪽으로 기운다.
● 왜 우리는 자식이 공부하길 바라는가
일단 짚자. 왜 우리는 공부를 하고, 자식들이 공부하길 바라는가? 돈? 온라인 게임? 안정?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것은 힘이다. 힘은 또 계급으로 넘어간다. 우리가 바란 것은 계급 상승이 아니었던가?
계급의 상승만 있어 해당 계급의 인구가 늘면 계급은 의미를 잃는다. 그래서 상위 계급은 필연적으로 사다리를 막는다. 왜 우리 교육은 답이 있고, 주입식이며, 상대평가를 하는가? 정답이 있는 시험은 반복과 범위를 사는 쪽이 이기고, 상대평가는 누군가 떨어져야 내가 올라간다.
둘 다 돈으로 살 수 있는 구조여서 지배계층이 누르기 좋고, 그들의 돈이 자식의 자식까지 올라갈 바탕이 된다. 답을 넣는 교육 위에 판단력과 창조적 사고를 기르는 교육이 함께 선다면 지배계층은 돈으로 산 힘을 쓰기 어려워지고, 그들 계급의 힘은 얕아진다.
사랑하는 자식이 있다. 자식을 사랑하여 모든 걸 다 해 준다고 생각해 보자. 자식은 제대로 클 것인가? 허용적인 부모가 의존적인 자식을 낳는다. 그 허용은 사랑으로 포장되어 있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자식을 자신의 통제 아래 두고 싶은 지배욕이 있다.
그렇다면 우리가 자식에게 공부를 바라는 마음은 어떤가. 자식을 위해서라고 답할 것이고, 그 말은 거짓이 아니다. 그런데 그 사랑 안에도 자식을 사다리 위에 올려 내 자리를 잇게 하거나, 자식으로 내 위치를 올리려는 마음이 섞여 있지 않은가. 사랑으로 포장된 지배욕은 가정에만 있지 않고, 교육 제도에도 같은 모양으로 있다.
왜 우리는 교육의 현실을 알면서도 바꾸지 못하는가? 지배계층의 힘이 세고, 우리가 이미 세뇌에 적응되어 있는 것은 아닌가? 사다리를 붙든 손은 위에만 있지 않다. 한 칸이라도 더 올리려고 학원비를 내는 우리 손도 그 사다리를 붙들고 있다.
● 시험을 바로 보는 공배주의
주입식을 아예 버리자는 것이 아니다. 판단에는 기본 지식이 없으면 안 된다. 그렇다고 바카라으로만도 안 된다. 편견 없이 다양한 지식과 경험이 있어야 한다. 필자가 코킹의 완전제거를 반박할수 있었던 이유도 경험과 판단할수 있는 지식이 있어서이다. 그것은 그것대로, 판단은 판단대로, 조화가 중요하다. 다만 지금 우리 교육은 한쪽으로만 기울어 있다. 슬롯에 필요한 지식을 중학교 초반에 거의 다 배운다면, 고입고사와 대입고사도 달라져야 한다.
3학년은 공부하는 기간이 아니라 시험을 치르는 시기로 삼는다. 새로 배우는 것이 아니라 복습하는 기간이다. 한 해에 네 차례 고사를 치르고 그중 가장 높은 점수를 반영한다. 1학년과 2학년에게도 기회를 주어, 원하면 고사에 응시해 자신의 능력으로 빠른 지식의 단계로 넘어가게 한다. 그러면서도 전 학년에 걸쳐 예체능과 봉사로 슬롯화 교육이 들어간다.
여기서 고사는 방식을 말한 것이다. 학력고사 시절을 기억하는 이는 암기 시험으로 돌아가자는 말로 들을지 모르지만, 그렇지 않다. 넓은 범위에 한 번을 걸게 하는 방식이 아니라, 줄인 범위를 여러 번 치르는 방식이다. 범위를 줄이면 혼자 공부로 감당할 수 있고, 기회를 늘리면 한 번 넘어져도 1년을 버틸 필요가 없다. 재수 비용으로 기회를 사야 하는 구조가 무너진다.
끝으로 정리하면, 범위는 줄이고 기회는 늘린다. 답도 외우고 왜 그런지 의문도 품을 수 있는 주체성을 기른다. 이것이 교육을 바로 보는 공배주의다. 기울어진 사다리를 바로 세우는 첫걸음은 여기서 시작하는 것이 맞지 않을까 생각한다.
5.2 봉사도 환원이다
코끼리 무리는 이동할 때 새끼를 가운데 두고 어른들이 둘러싸 걷는다. 사자 새끼들은 하루 종일 서로 뒤엉켜 물고 뒹구는데, 그 장난 속에서 몸을 낮추고 덮치는 법을 익혀 사냥을 배운다.
무리가 새끼를 지키고, 새끼는 놀며 배운다. 누가 가르쳐 준 것이 아니다. 학교라는 개념은 본능 안에 이미 있었던 것이다.
사람도 다르지 않았다. 학교를 뜻하는 영어 school의 뿌리는 그리스어 '스콜레'이고, 그 뜻은 '여가'다. 배움은 본래 일에서 풀려난 자리, 노는 자리에서 났다.
그런데 지금의 학교를 떠올리면 여가도 놀이도 아니다. 앞 절에서 보았듯 친구끼리 줄을 세우고 정해진 답을 외우게 하는 곳이다.
그래서 학교 자체를 탓하는 이도 있다. 그러나 학교란 형식은 지배 권력이 만들었으나 개념 자체는 본능이다.
학교가 그릇이라면 교육은 음식이다. 권력이 그릇을 만들었으니 담기는 음식도 그 그릇을 따랐다. 지금 교육은 '머리에 무엇을 넣을 것인가'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그렇다면 학교는 무엇이어야 하는가. 무리 안에서 함께 살아가는 법을 배우는 곳이 아닐까 생각한다.
공배주의가 지향하는 교육은 슬롯 구성원으로서 슬롯를 이해하고, 그 안에서 자신이 무엇을 할지 고민하는 마음을 기르는 것이다. 앞 절에서 지식의 범위를 줄이자고 한 이유가 그 때문이다. 지식이 차지하던 자리 일부를 예체능과 봉사에 돌려주기 위해서다.
달리기와 조정 경기를 비교하여 떠올려 보자.
달리는 사람은 앞만 본다. 앞지를 사람만 보고 이기려 한다.
조정은 반대다. 조정 선수는 배가 나아가는 쪽을 등지고 앉아, 뒤에 떨어진 사람을 보며 노를 젓는다.
혼자 잘해서는 배가 나아가지 않고 같이 저어야 나아간다. 이것은 팀워크, 곧 함께 협조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는 뜻이다. 그리고 시선은 뒤를 보아야 한다. 이것은 봉사, 곧 뒤처진 이들을 볼 수 있어야 한다는 뜻이다.
앞지를 사람만 보게 하는 교육이 성과주의라면, 뒤처진 사람을 보며 함께 나아가게 하는 교육이 팀워크와 봉사이며, 이것은 머리로 외워서 아는 것이 아니라 몸으로 겪어야 안다.
몸으로 겪어야 아는 것은 여럿이겠지만, 필자는 셋을 꼽아 본다.
주는 마음과 그 기쁨이다.
받는 데만 익숙한 아이는 내놓는 법을 모른다. 연탄 한 장을 날라 본 아이는 내 손을 떠나 남에게 건너간 것이 내 손에 쥐고 있을 때보다 더 큰 기쁨으로 돌아온다는 것을 안다. 주는 기쁨은 말로 가르칠 수 없고 베풀어 본 사람만이 느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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