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장. 공배주의 정치대안
4장. 공배주의 정치대안
세상은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처럼 아이러니투성이다.
나쁜 것인데 있기도 하고, 나쁘다 하여 없앤 것이 오히려 더 비정상인 경우도 있다.
담배가 나쁘다는 것은 누구나 알지만 나라는 담배를 없애지 않는다. 흡연구역을 만들어 방향을 틀고, 담뱃값에 붙은 부담금으로 건강 사업을 한다.
도박도 나쁘다고 하면서 편의점마다 로또가 있다. 막기만 하면 불법 도박으로 숨어들지만, 나라가 드러내어 규칙을 두고 판 돈의 일부를 복권기금으로 공익에 쓴다. 나쁘다고 없애지 않고, 있다는 것을 인정한 것이다.
운동회는 게임이고, 게임에는 승부가 있다. 그런데 요즘은 운동회를 아예 무승부로 끝내는 학교도 있다고 한다. 이기고 지고 그것으로 나뉘는 것이 아이들에게 상처가 된다는 것이다.
아이들이 모르겠는가? 2학년만 되어도 알 것이다. 조작된 승부가 재미있겠는가? 이기지도 지지도 않는 게임을 과연 정상이라 볼 수 있을까. 산타클로스를 믿는 아이로 남기를 바라는 부모의 허황된 통제가 아닌가.
무승부로 만든다고 승부가 없어지지는 않는다. 점수판을 치웠을 뿐 누가 이겼는지는 아이들 마음속에 그대로 남으니, 없앤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게 가린 것이다. 이기려고 달린 아이의 땀은 어른들의 손에 없던 것이 되니, 상처를 막겠다며 불공정을 가르치는 꼴이다.
이처럼 계급이란 것도 마찬가지다. 계급은 나쁘다. 인간 위에 인간은 있으면 안 된다.
그러나 '나쁘다'와 '있다'는 다르면서도 공존한다. 생명을 죽이는 것은 나쁘다 해도 인간은 잡식성이다. 앞에서 폭력을 두고 한 이야기와 같다. 위계는 인간의 본능이고 나쁘다고 사라지지 않는다.
어차피 본능으로 올 계급슬롯라면, 방향을 튼 계급슬롯가 낫지 않을까 생각한다.
방향을 틀 수 있는 까닭은 인간이 한 가지 마음만 가진 존재가 아니기 때문이다. 지배욕과 이타는 서로 다른 말이지만 인간은 둘 다 가지고 있다. 우리가 부모님에게 사랑과 미움을 같이 품는 것처럼, 이것을 양가감정이라 한다.
환원이라는 한 행동은 이 둘을 동시에 채운다. 내놓은 만큼 순위가 오르니 지배욕이 채워지고, 내놓은 것이 공동체로 가니 이타가 채워진다.
처음에는 순위가 탐나서 내놓았어도 상관없다. 착하지 않아도 된다. 내놓는 일을 되풀이하는 사람이 곧 이타적인 사람이다. 이타적이어서 이타적 행동을 하는 것이 아니라 이타적 행동을 해서 이타적인 것이다. 행복해서 웃는 것이 아니다. 웃어서 행복한 것이다.
그렇다고 공배주의가 완성된 인류 공동체를 지금 당장 요구하는 것은 아니다. 공배주의는 국가 단위의 경쟁 속에서 통용되는 과도기적 체제다. 개인과 가족의 이기주의가 국가 공동체의 이기주의로, 그리고 궁극적으로 인류 공동체 의식으로 나아가는 긴 여정의 첫걸음이다.
이제 과도기적인 공배주의가 어떤 모습일지 들어가 보자.
4.1 계급슬롯로의 회귀는 진보인가 퇴보인가
진보라는 말에는 오해가 있다. 진보는 나아간다는 뜻인데, 이 말이 기술의 진보와 섞여 쓰이면서 우리는 새로운 것이 곧 진보라고 여기게 되었다. 산업혁명 이후 과학이 발전하면 슬롯도 저절로 좋아질 것이라는 믿음이 두 진보를 한 단어로 묶어 놓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기술의 진보와 슬롯·정치의 진보는 다르다. 패스트푸드점 키오스크 앞에서 한참을 서 있다가 끝내 주문하지 못하고 돌아서는 노인의 이야기는 이제 뉴스거리도 되지 못한다. 주문하는 기계는 분명 나아졌지만 그 노인의 하루가 나아졌다고 말할 수는 없으니, 기술은 앞으로 갔는데 한 사람의 삶은 뒤로 밀려난 것이다.
유발 하라리는 『사피엔스』에서 농업혁명을 역사상 최대의 사기라 불렀는데, 농사는 인류의 수를 불렸지만 한 사람 한 사람은 수렵채집인보다 더 오래 일하고 더 자주 굶주렸기 때문이다. 땅과 가축이 생기자 물려줄 것이 생겼고 세습도 그때 시작되었으니, 기술이 나아간 자리에서 슬롯는 계급으로 물러선 셈이다.
권위라는 말도 그렇다. 우리는 권위적인 상사, 권위적인 아버지처럼 '권위적'이라는 말을 욕으로 쓰다 보니 권위를 권력과 같은 것으로 여기는지 모른다.
지금 바로 작가의 멤버십 구독자가 되어
멤버십 특별 연재 콘텐츠를 모두 만나 보세요.
오직 멤버십 구독자만 볼 수 있는,
이 작가의 특별 연재 콘텐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