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장. 중도가 본 현실 정치
2장. 중도가 본 현실 정치
사람들이 오가는 큰길이 있다. 길은 목적지로 가는 통로이고, 길 위의 사람들은 저마다 다른 목적지를 향해 같은 길을 공유한다. 그런데 이 길 한가운데서 두 무리가 싸움을 벌인다. 필자는 이 두 무리를 양극단이라 부르고, 그 곁을 지나는 사람들을 중도라 부르려 한다.
싸움을 본 행인들의 반응은 여러 갈래로 나뉜다. 싸움을 외면하고 제 갈 길을 가는 사람이 있고, 발걸음을 멈추고 구경하는 사람이 있다. 필자는 앞의 사람을 외면파, 뒤의 사람을 눈팅이라 부른다. 둘 다 어느 편에도 서지 않았으니 중도다.
구경하던 사람들 가운데 한쪽을 응원하는 이가 생긴다. 필자는 이들을 스피커라 부른다. 스피커는 스스로 중도라 말하지만 이미 한쪽 무리의 목소리를 키우고 있으며, 그 가운데에는 양극단이 고용한 사람들, 곧 카르텔이 섞여 있을 수 있다. 누가 제 뜻으로 응원하는 사람이고 누가 고용된 사람인지 길 위에서는 가려낼 수 없다. 그래서 이들은 오염된 중도이고, 필자는 이들을 중도로 보지 않는다.
그러다 싸우는 무리 사이로 나서서 말리는 사람이 나온다. 필자는 이 사람을 오지랖퍼라 부른다. 어느 편도 들지 않고 행동하는 사람이니 적극적 중도다. 오지랖퍼를 응원하는 스피커도 나오는데, 이들은 한쪽 무리가 아니라 말리는 쪽의 목소리를 키우니 소극적 중도다. 필자 또한 이 스피커에 속한다. 다만 지금 길 위에는 나서서 말리는 오지랖퍼가 없어서, 필자의 소리는 응원할 대상을 찾지 못한 채 공허하게 울릴 뿐이다.
정리하면 필자가 보는 중도는 외면파, 눈팅, 오지랖퍼, 그리고 오지랖퍼를 응원하는 스피커다.
여기에 반론이 있을 수 있다. 외면하고 지나가는 사람이나 구경만 하는 사람은 방관자일 뿐인데 중도라 부를 수 있느냐는 것이다. 필자의 답은 이렇다. 길 위의 모든 사람은 같은 길을 공유한다. 길 한가운데서 싸움이 벌어지면 외면하는 사람도 돌아가야 하고, 늦어지고, 때로는 다친다. 직접이든 간접이든 피해는 오니, 싸움을 보든 안 보든 길 위의 사람은 이미 그 싸움에 말려 있다. 게다가 어느 무리든 처음에는 방관자에서 시작하고, 중도도 다르지 않다. 필자 또한 결혼하고 아이를 낳기 전까지 정치를 외면했다. 그러나 외면한다고 영향이 없을 리 없었다. 그래서 필자는 중도를 넓게 본다.
반대로 생각해 보면 중도의 정체가 더 분명해진다. 두 무리가 싸우지 않는다면 중도도 없다. 중도가 있다는 것은 양극단이 있다는 말이다. 싸움이 없는 길 위의 사람들은 중도가 아니라 그저 제 길을 가는 사람들이며, 필자는 이들을 스스로 알아서 제 길을 가는 자도(自道)라 부르고 싶다. 중도는 양극단이 길을 막았을 때 붙는 이름이고, 싸움이 끝나면 사람들은 다시 자도로 돌아간다.
그렇다면 오지랖퍼는 무엇이라 말하는가. 싸우지 말라고, 싸우려면 길을 막지 말고 비켜서 싸우라고 한다. 이 말을 문제를 덮으라는 말로 읽어서는 안 된다. 문제를 찍어 눌러 보이지 않게 하는 것은 해결이 아니라 숨기는 것이다. 오지랖퍼의 말에는 세 가지가 담겨 있다. 길을 막지 말 것, 말리는 사람도 그 자리로 따라가 끝까지 말릴 것, 결론이 나면 길 위의 모두에게 알릴 것. 싸움을 옮기는 것과 덮는 것은 다르다. 옮기는 것은 해결의 과정이고, 덮는 것은 해결의 흉내다.
끝까지 말려야 하는 이유는 후환 때문이다. 어느 한쪽이 이겨 길을 차지하면 이긴 무리는 길의 주인이 되려 한다. 그 길로만 가라 하고, 통행을 허락하거나 막는다. 이것이 독재이고, 길을 소유하려는 자가 언제든 나타날 수 있다는 것이 길 위의 사람들이 안고 가는 불안이다. 한쪽의 승리는 문제를 풀지 못한다. 진 쪽을 찍어 눌렀을 뿐이니 문제는 언젠가 다시 불거진다.
중도에게 누가 이기느냐는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각자의 목적지에 안전하게, 제재 없이 가는 것이다. 어떻게든 가기만 하면 된다는 것이 아니며, 길 위의 사람은 그 목적을 잊어서는 안 된다.
문제를 정확히 보려면 문제 밖에 서서 보아야 한다. 싸움 속에 든 사람은 자기 편의 눈으로만 본다. 스스로를 한 걸음 떨어져 보는 것이 메타인지이고, 그렇게 보아야 객관이 된다. 중도의 자리에 서야 객관이 가능하다. 필자는 이 자리에서 한국 정치를 보려 한다. 누가 이겼는가가 아니라, 길을 모두에게 열어 두었는가를 볼 것이다.
2.1 한국 근대정치의 탄생
[조선]
조선은 오백 년 동안 중국을 중심으로 섬기는 사대(事大)의 질서 안에서 살았다. 큰 나라를 중심에 두고 그 안에서 살아남는 동안, 사대주의는 안으로 뭉치는 끈끈한 민족성을 낳았고, 민족성은 우리를 지키는 힘이 되었다. 그러나 바깥의 역사는 이미 산업혁명과 자본주의로 꿈틀대고 있었고, 기술은 발전을 거듭했다. 기술을 앞세운 나라들이 문을 두드리자 우리를 지키던 힘은 문을 걸어 잠그는 쪽으로 움직였다. 흥선대원군은 병인양요(1866)와 신미양요(1871)를 치른 뒤 전국에 척화비를 세웠다. 그러나 문은 1876년 강화도조약으로 남의 손에 열렸고, 1905년 을사늑약으로 외교권을, 1910년 경술국치로 나라를 잃었다. 우리는 졌다. 우리를 지키던 민족성이 이때는 독이 되었다.
[일제강점기]
일제강점기를 거치며 우리는 빠르게 변했다. 중심이 중국에서 일본으로 바뀌자 사대주의는 새 중심에 빠르게 적응했다. 그러나 민초는 민족성을 지켰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났고, 같은 해 4월 상하이에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세워졌다. 나라가 없는 동안 나라를 지킨 것은 관리도 양반도 아닌 민초였다. 끈끈한 민족성이 빛을 발한 때다.
[광복과 분단]
민족성으로 버티던 우리는 1945년 8월 15일 일제가 패망하면서 광복을 맞았다. 그러나 세계는 이념 전쟁으로 가고 있었다. 한반도는 38선을 경계로 미국과 소련에 나뉘어 점령되었고, 1948년 남과 북에 각각 정부가 섰다. 우리가 원한 적 없는 이념이 주입되었고, 사대주의는 이번에도 빠르게 적응했다. 남은 미국을, 북은 소련을 새 중심으로 삼았다.
[6·25]
이념 전쟁은 1950년 6월 25일 비극으로 터졌다. 서로 다른 중심을 좇은 사대주의는 우리를 빠르게 갈라놓았고, 같은 민족이 서로의 적이 되었다.
이때 대통령 이승만의 행적은 지도자가 무엇인지를 묻게 한다. 그는 27일 새벽 내각이나 국회에도 알리지 않고 수행원 몇 명만 데리고 열차로 남쪽으로 떠났다. 대전에 도착한 뒤에는 정부가 서울을 지키고 있으니 동요하지 말라는 취지의 육성을 녹음했고, 이 녹음이 서울에서 방송되자 시민들은 대통령이 서울에 있는 줄 알았다. 28일 새벽 2시 30분 한강인도교가 폭파되었고, 방송을 믿고 늦게 피난길에 오른 피난민 수백 명이 다리 위에서 희생되었다. 사망자는 500~800명으로 추정되며, 폭파의 바카라임 소재는 지금까지도 분명히 가려지지 않았다. 그러나 국민에게 머물라 하고 자신은 떠났다는 사실은 가려질 수 없다. 전쟁은 1953년 7월 27일 정전협정으로 멈췄고, 38선은 휴전선이 되었다.
[독재 뒤 독재]
이후 한국 정치는 독재 뒤에 독재가 오는 역사였다. 이승만의 독재는 1960년 3·15 부정선거 끝에 4·19혁명으로 무너졌다. 그러나 1961년 5·16으로 박정희가 권력을 잡으면서 독재는 군사독재로 옷을 바꿔 입었다. 박정희는 1972년 유신헌법으로 종신 집권의 길을 열었고, 1979년 그가 죽자 전두환이 12·12로 권력을 쥐고 1980년 5월 광주를 짓밟았다. 1987년 6월 항쟁으로 국민은 대통령 직선제를 되찾았지만, 그해 12월 당선된 사람은 12·12를 함께 일으킨 노태우였다. 독재를 끝낸 것은 매번 민초였다.
독재의 패턴은 사대주의와 맥을 같이한다. 중심을 섬기던 습관은, 스스로 중심이 된 자에게서 "내가 중심이니 내 말이 맞다"로 바뀐다. 그런데 이 시기에 나라는 발전했다. 1인당 국민소득은 1977년 1,000달러를 넘었고, 1980년대 후반에는 저유가·저금리·저달러의 3저 호황 속에 고도성장을 이어 갔다. 이것은 인정해야 한다. 독재의 죄와 발전의 공은 따로 적어야 한다. 한쪽으로 다른 쪽을 지우는 순간, 우리는 대로의 두 패거리 중 하나가 된다.
[문민정부의 등장]
1993년 김영삼 정부가 들어서며 군인 대통령의 시대가 저물었다. 김영삼은 민주화 운동을 이끈 사람이었지만, 1990년 노태우의 민정당과 3당 합당을 한 뒤 그 진영의 후보로 당선되었다. 필자는 이 시기를 과도기로 본다. 민주 진영이 이기기 위해 택한 전술이었을지도 모른다.
이후 한국 정치는 군사정권의 뿌리를 이은 보수 진영과, 그에 맞서 연대해 온 민주·진보 진영의 양당 구도로 굳어졌다. 중심을 섬기던 습관은 이번에는 두 진영을 중심으로 삼았다. 남과 북이 그랬듯 중심이 두 갈래가 되자, 두 진영은 정권을 주고받으며 점점 전쟁처럼 싸웠다. 보수는 대놓고 가진 자를 옹호했고, 민주·진보는 억강부약을 외쳤다.
그러나 자산이 가장 크게 오른 때는 민주·진보 진영이 정권을 잡았을 때였다. 경실련이 1993년 이후 서울 아파트 34개 단지의 가격을 정권별로 조사한 결과, 상승률은 노무현 정부가 평균 94%로 가장 높았고 상승액은 문재인 정부가 25평 기준 4억 5천만 원으로 가장 컸다. 강남 아파트값은 1993년 2억 2천만 원에서 2020년 21억 원으로 올랐는데, 그 가운데 13억 9천만 원이 노무현·문재인 두 정부에서 올랐다. 억강부약을 외친 쪽의 집권기에 가진 자의 자산이 가장 크게 불어난 것이다.
두 진영 모두에게 중도는 없었다. 극렬하게 싸우던 때에도 자신들의 이익 앞에서는 하나가 되었다.
2009년 7월 여야는 미디어법을 두고 본회의장에서 몸싸움까지 벌였다. 그로부터 일곱 달 뒤인 2010년 2월 25일, 국회는 국회의원 연금법을 출석 191명 가운데 찬성 187명으로 통과시켰다. 국회의원을 하루만 지내도, 범죄를 저질러도 65세부터 평생 매달 120만 원을 받는 법이었다. 법안은 조용히 통과되었고, 국민은 여섯 달이 지나서야 알았다.
2011년 3월 4일 국회 행정안전위원회는 여야가 함께 정치자금법 개정안을 기습 처리했다. 기업이나 단체가 직원·회원의 이름을 빌려 쪼개 준 후원금을 처벌할 수 없게 하는 내용으로, 국회의원 스스로에게 면죄부를 준 셈이었다.
월급도 다르지 않았다. 2012년에는 19대 국회의원의 월급이 18대 국회 평균보다 20.3% 오른 사실이 드러났다. 그것도 원내대표가 지나가듯 한 말에서 알려졌고, 여야가 한목소리로 특권 내려놓기를 외치던 때였다. 같은 해 대선을 앞두고 여야는 국민 앞에서 자기 월급을 30% 깎겠다고 약속했다. 민주당은 소속 의원 전원이 서명했고, 새누리당도 따르겠다고 했다. 그러나 깎겠다던 월급은 3년 동안 한 푼도 깎이지 않았다. 그리고 2015년 11월, 그들은 오히려 월급을 올렸다. 월급을 올리는 동안 여야 의원 누구도 그 일에 대해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대로의 두 패거리는 길 한가운데서 싸우면서도, 자신에게 이익이 되는 일에는 손을 잡았다. 필자는 이것이 현재 거대 양당 힘싸움의 민낯이 아닐까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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