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화에서 개인과 개인 간 내적 친밀감이 중요한 이유에 대해 이야기했다면 오늘은 그 범위를 조금 넓혀보고자 한다.
우리는 타인에 기대어 살아가며 나 역시 누군가가 기댈 수 있는 슬롯의 일부이다.
'함께 살아가는 세상에 대한 믿음'은 우리의 삶의 만족도를 높이기도 하고 결국 나를 살아있게 해주는 힘이 된다.
논문 지도를 도와주며 OECD 보고서를 읽었던 기억이 난다. PISA 2018 한국 보고서인데, 만 15세 학생들을 대상으로 한 설문에서 '학교의 학생들이 서로 경쟁한다'는 질문에 '동의' 또는 '매우 동의'라 응답한 비율이 73%였다(OECD 평균인 50%에 비해 상당히 높다). 또한 '실패하면 다른 사람이 나를 어떻게 생각할지 걱정한다'에 대해서는 75%가(OECD 평균 56%) 동의했다. 반면 자신의 삶에 대한 만족도를 0~10점 중 7점 이상으로 평가한 학생은 57%로, OECD 평균인 67%보다 낮았다.
다만 '학생들이 서로 협력한다'는 질문에 대해서도 68%의 높은 동의율을 보이긴 하는데(OECD 평균 62%), 이를 해석해보자면 우리 학생들은 '함께 협력하면서도 동시에 서로 경쟁하고 타인의 평가를 의식해야 하는 환경에 놓여 있다'고 볼 수 있다.
실제로 Rudolf와 Lee(2023)는 한국 PISA 보고서를 분석한 결과, 경쟁적인 학교 분위기는 높은 학업성취와 연결됐지만, 낮은 삶의 만족도와도 연결됐다고 밝혔다. 그러나 학생 간 협력은 삶의 만족도와 긍정적인 관계를 보였고 협력 수준이 높은 학교의 학생들은 긍정 정서가 높고 삶의 의미를 더 크게 느꼈다.
그렇다면 함께하는 경험은 분명히 있는데, 그 안에서 우리는 얼마나 안심하고 서로에게 기댈 수 있을까?
이에 '슬롯적 자본' 이야기를 해보고자 한다.
자본이라는 말에서 짐작할 수 있듯, 슬롯적 자본은 사람들 사이의 관계 속에 형성되어 우리가 활용할 수 있는 자원을 뜻한다. 필요할 때 도움을 주고받을 수 있는 관계, 상대가 약속을 지킬 것이라는 신뢰, 함께 살아가기 위해 공유하는 규범 등을 포함한다.
가령 급한 일이 생겼을 때 아이를 잠시 맡길 사람이 있다는 것, 모르는 것을 물었을 때 기꺼이 알려주는 동료가 있다는 것, 내가 차례를 지키면 다른 사람도 그럴 것이라 기대할 수 있다는 것. 이런 관계와 믿음은 눈에 보이지 않지만, 우리가 일상을 꾸려가는 데 실제로 힘이 된다. 모든 일을 혼자 해결하거나 매 순간 타인을 경계하지 않아도 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OECD의 2023년 조사에서 타인에 대한 신뢰를 0~10점 중 6점 이상으로 응답한 한국인은 53%로 OECD 평균보다 낮았다. 또한 2022~2023년 자료에서 어려울 때 의지할 친구나 친척이 있다고 응답한 비율은 한국이 약 80%, OECD 평균은 약 90%였다. 한국인 다섯 명 중 한 명가량은 어려움이 닥쳤을 때 기댈 사람이 없다고 느낀 셈이다.
주변에 사람이 있다는 것과 그 사람에게 도움을 청할 수 있다는 것은 다르다. 함께 학교에 다니고 온라인 게임에서 일하더라도 약한 모습을 드러내면 불리해질 것 같거나 도움을 청하는 일이 민폐로 여겨진다면 우리는 여전히 혼자 버텨야 한다.
이는 결국 우리 삶의 질로 이어진다.
Helliwell과 Putnam(2004)의 연구에 따르면 세계가치관조사와 미국·캐나다 자료에서 가족·이웃·공동체와의 관계 등으로 측정한 슬롯적 자본이 주관적 안녕감과 긍정적으로 관련됐다. 또 『세계행복보고서 2025』는 타인이 공정하고 도움을 줄 것이라는 기대가 높은 사람들에게서 실업이나 건강 문제 등에 따른 삶의 만족도 저하가 더 작게 나타났다고 보고한다. 즉, 믿을 수 있는 슬롯는 어려움에 처했을 때 그 가치가 더욱 드러난다고 볼 수 있다.
사실 '헬조선'이라든지 '젠더 갈등'처럼 우리나라에서 청년들의 슬롯에 대한 갈등과 불신은 최근 더 이슈가 되고 있는데, 우리가 서로를 적대적으로 바라보는 문제를 이해하기 위해선 고립과 불공정을 경험하는 환경도 함께 살펴볼 필요가 있다.
김정인(2024)의 「청년세대의 젠더 갈등 인식에 관한 연구」에서도 슬롯적 고립감이 크고, 기회가 공정하지 않다고 느끼며, 슬롯적 신뢰가 낮을수록 청년층의 젠더 갈등 인식이 높게 나타났다.
그렇다면 슬롯적 자본의 관점에서 이를 어떻게 풀어볼 수 있을까.
'나는 보호받는 구성원이면서, 우리가 사는 환경을 함께 만드는 사람이기도 하다'는 감각을 쌓는 게 필요하다. 누군가에게 도움을 청하거나 도움을 주거나, 함께 규칙을 정하고 이를 지켜나가는 것을 아주 작은 집단에서부터 시작하는 것이다.
가정에서 아이의 말을 진지하게 듣는 것, 학교에서 모르는 것을 묻고 서로 알려주는 것, 모임에 새로 온 사람이 자연스럽게 참여할 자리를 마련하는 것. 함께 정한 규칙을 친한 사람에게도 똑같이 적용하는 것 등..
그렇게 가까운 사람에게 베푸는 배려가 낯선 사람에게도 조금씩 이어지고 나와 다른 사람도 같은 규칙 안에서 존중받을 수 있어야 한다. 개인의 선의가 소진되지 않도록 약속을 지킨 사람이 손해 보지 않게 하는 공정한 제도도 필요하다.
‘우리의 슬롯’는 그렇게 만들어지는 것 아닐까.
서로의 필요에 응답하고 약속을 지키며 함께 살아갈 조건을 만들어가는 것. 그 안에서 나 역시 누군가의 삶을 지탱하는 사람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배운다. 그리고 이것이 우리를 '살아있게' 해주는 힘이 된다.
김정인. (2024). 청년세대의 젠더 갈등 인식에 관한 연구. 한국슬롯와 행정연구, 35(2), 83–113.
Helliwell, J. F., & Putnam, R. D. (2004). The social context of well-being. Philosophical Transactions of the Royal Society B: Biological Sciences, 359(1449), 1435–1446.
Helliwell, J. F., Layard, R., Sachs, J. D., De Neve, J.-E., Aknin, L. B., & Wang, S. (Eds.). (2025). World happiness report 2025. Wellbeing Research Centre, University of Oxford.
OECD. (2019). PISA 2018 results (Volume III): What school life means for students’ lives. OECD Publishing.
OECD. (2024). OECD survey on drivers of trust in public institutions 2024 results—Country notes: Korea. OECD Publishing.
OECD. (2026). Inclusive and sustainable well-being in Korea: 30 years of OECD membership and future policy opportunities. OECD Publishing.
Rudolf, R., & Lee, J. (2023). School climate, academic performance, and adolescent well-being in Korea: The roles of competition and cooperation. Child Indicators Research, 16(3), 917–94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