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엇을 위해 쓰는가
AI와 교육에 관한 강의였다.
첫 질문에서 손이 멈췄다.
"선생님들은 AI를 무엇을 위해 쓰실 겁니까?"
누군가는 평가를 맡기겠다고 하고, 누군가는 수업 안을 짜는 데 쓰겠다고 한다. 예전엔 몇 날 며칠 붙들고 있던 레슨 플랜이 이제 오 분이면 나온다. 행정 문서를 줄이는 데 쓰겠다는 사람도 있다. 그리고 아주 드물게, 아이들과 마주 앉아 생각을 키우는 데 쓰겠다는 사람이 있다.
강사는 말했다. 무엇을 위해 쓰느냐가 어떻게 쓰느냐를 결정한다고. 그리고 그 결정은 결국 선생님들이 해야 한다고.
나는 그 문장을 조용히 바꿔 들었다. 작가는 AI를 무엇을 위해 쓰는가. 아니, 그보다 먼저. 나는 무엇을 위해 쓰는가.
먼저 온 미래를 겪은 사람들
강사는 한 권의 바카라을 꺼냈다. 장강명 작가의 『먼저 온 미래』.
SF 소설을 쓰는 작가가 어느 날 AI가 글을 너무 잘 쓰는 걸 보고 위기를 느꼈다고 한다. 그래서 물었다. 그럼 우리는 어떻게 살아남아야 하나. 그리고 답을 찾으러 간 곳이 바둑판이었다.
알파고가 나온 지 십 년. 자기 직업 한가운데에 AI라는 폭탄을 가장 먼저 맞은 사람들이 바둑기사였다. 작가는 그들을 찾아가 십 년을 어떻게 버텼는지 물었다.
그 대목에서 나는 숨을 한 번 골랐다. 남의 이야기가 아니었다. 그 바카라 속 작가가 느낀 막막함은 지금 내 바카라상 위에도 있다. 밤새 고친 문장보다 매끈한 문장이 몇 초 만에 화면에 떠오를 때, 나도 같은 질문을 한다.
강사는 두 가지 질문을 던졌다. AI가 사람보다 바둑을 잘 둔다면, 그게 우리에게 중요한가.
바둑을 좋아하는 사람에게는 흥미로운 일이겠지만, 대부분에게는 아니다. 그러나 바둑으로 밥을 먹는 사람에게는 삶이 흔들리는 일이다.
그 질문을 교실로 옮기면 이렇게 된다. AI가 교사보다 수업 안을 잘 짜고, 평가를 잘하고, 아이들을 잘 가르친다면, 그래도 교사가 필요한가.
작가의 바카라상으로 옮기면 이렇게 된다.
AI가 나보다 이야기를 잘 쓴다면, 그래도 작가가 필요한가.
기풍이 사라진 자리
두 번째 질문은 더 아팠다. 창의성은 인간만의 것인가.
창의성은 그 분야의 사람들이 인정해 줄 때 비로소 창의성이 된다고 한다. 그런데 바둑의 최고수들이 먼저 고개를 끄덕였다. AI의 수가 사람보다 더 창의적인 것 같다고. 오히려 사람이 틀에 갇혀 있었던 것 같다고.
바둑에는 기풍이라는 말이 있다. 사람마다 돌을 놓는 결이 다르다. 대담한 사람, 신중한 사람, 집요한 사람. 바둑판 위에 그 사람이 보였다.
그 기풍이 사라졌다고 했다. 자기 결대로 두는 수가 AI의 수보다 낫지 않다는 걸 알게 되자, 사람들은 이기는 쪽을 택했다. 효율과 효과 앞에서 다른 길은 없었다. 이제 바둑판에 남은 것은 확률이다. AI가 높다고 계산한 수. 왜 그 수인지 묻지 않고 그 수를 외우고 가르친다.
나는 그 말을 듣다가 펜 끝으로 노트에 작게 적었다.
문체.
작가에게 기풍은 문체다. 같은 이야기도 누가 쓰느냐에 따라 다른 온도로 읽힌다. 만약 모두가 확률적으로 가장 잘 읽히는 문장만 고른다면, 서점의 바카라들은 한 사람이 쓴 것처럼 비슷해질 것이다. 매끈하고, 틀린 곳 없고, 누구의 것도 아닌 문장들.
떠난 사람과 남은 사람
바둑기사들은 두 갈래로 나뉘었다고 한다.
한쪽은 떠났다. 이세돌 9단이 그랬다. 그는 더 이상 낭만이 있는 바둑을 볼 수 없을 것 같다고 했다. 지더라도 한 판에 혼신을 쏟았기에 그 패배조차 가치 있던 시절. 그 의미가 사라지자 재미도 사라졌다. 그는 바둑판을 떠났다.
다른 한쪽은 남았다. 지금 세계 1위인 신진서 9단은 AI의 바둑을 '신계의 바둑'이라 부른다고 했다. 우리는 인간계의 바둑을 두고, 신계의 바둑에서 배우며 자란다. 그는 그렇게 자기 자리를 다시 정의했다.
요즘 기원 풍경도 달라졌다고 한다. 아이들이 노트북에 AI를 켜 놓고 바둑을 배운다. 그리고 선생님에게 묻는다.
"선생님, AI는 이 수가 확률이 더 높다는데 왜 그렇게 두셨어요?"
강사가 물었다. 괜찮으시겠어요? 교실에 AI가 들어와서 아이들이 그렇게 묻는다면.
강의실이 잠깐 조용해졌다. 나도 대답하지 못했다. 다만 그 질문 앞에서 떠오른 얼굴이 하나 있었다.
세 번, 다시 그리던 손
병실의 그 아이였다.
"아줌마, 나 고슴도치 한 마리 그려줘."
나는 고슴도치를 그렸고, 아이는 고개를 저었다. 다시 그렸고, 또 고개를 저었다. 세 번째 그림을 받아 들고서야 아이는 웃었다. 그 그림이 잘 그려서가 아니었다. 내가 아이의 표정을 보고, 아이가 원하는 걸 짐작하고, 다시 연필을 잡았기 때문이었다.
AI라면 첫 번째에 완벽한 고슴도치를 그렸을 것이다. 가시 하나 틀리지 않고, 확률적으로 가장 고슴도치다운 고슴도치를. 하지만 그 아이가 원한 건 완벽한 고슴도치가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자기 말을 듣고 다시 그려 주는 사람이었을지도 모른다.
바둑기사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나는 내 자리를 생각했다. 나는 떠나는 쪽일까, 남는 쪽일까.
아직 모르겠다. 다만 하나는 안다. 확률이 가장 높은 문장이 늘 가장 필요한 문장은 아니라는 것. 누군가의 얼굴을 보고 다시 쓰는 일, 그 아이를 위해 세 번 연필을 잡는 일.
그건 계산이 아니라 마음이 하는 일이다.
먼저 온 미래 앞에서 작가의 일은 아마 거기서 시작될 것이다.
이기는 수를 찾는 대신,
한 사람을 위해 다시 쓰는 일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