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나 타인은 진정한 내가 아닌, 껍데기를 본다.
우리는 우리가 언제나 생태학적 오류를 범하지는 않는지 생각해봐야 한다. 사실 엄밀하게 말하면 누군가가 어떤 집단에 소속된 개인을 바라볼 때의 고정관념이자 집단 동질성 편향이겠다만, 인간의 본능을 강조하는 느낌으로 생태라는 어휘를 가져왔다.
즉, 어떤 주체가 어떤 집단에 속한다는 사실만으로 그 집단성이 곧 그 구성원 하나의 개별주체 전부일 것이라 단정하는 것이 ecological fallacy이자 집단 동질성 편향.
결국 내가 하고자하는 말은 이 모든 것이 사실 본질적으로 생태적이란 것. 왜일까? 나는 인간의 동물적 본능에서 답을 찾고자한다.
이러한 인식의 기원은 상당히 오래된 것이다. 진화심리학적으로 보았을 때, 생존을 하기 위해서 인류는 상대 공격자의 특성을 아주 빠르게 파악하고 처신해야 살아남을 수 있었다.
이런 측면에서 인간이 타인의 장점이 아닌 단점만을 기억하는 이유 또한 간단할 것 같다. 오래전 오스트레랄로피테쿠스 이래로 자연 상태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다른 생물의 약점을 알고 그 허점을 노려 그 생물을 찢어발겨야만 살아남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한 습성을 가진 이만이 진화론적으로 생존할 수 있게 되었으며 점차 사피엔스는 아주 기민하게 생존에 특화되어만 갔다는 것이다. 이것이 비열하다고 사람들이 말하곤 하지만 이것은 본능이었다.
하지만 너무나 빠르게 타인을 재단해 버리는 이 태도, 타인을 찢어발기려는 이 본능이 현대 슬롯에서는 결국 심각한 문제를 야기한다고 생각한다. 타인을 자기의 편의대로 규정하게 된다는 것, 칸트적으로 봤을 때 타인을 대상화한다는 것이다.
사실 타인을 대상화하여 그를 결국 수단으로만 사용하는 이 태도는 진화심리학적 '생존'의 관점에서 심지어 현대슬롯에서 까지도 정당화되어만 가고 있는 게 현실이다. 당장에 면접의 현장을 생각해 보라, 많은 기업의 면접관들은 면접자들이 문을 열고 의자에 앉는 순간부터 그들의 모든 것을 알 수 있고 그때 이미 당락이 결정된다고 말한다.
마찬가지로 학벌, 출신 등 요소에서 이미 당신의 인상은 결정되어 버리는 게 현실일 수도 있다. 아마 이것은 심리학적인 직관일 텐데, 결국 이것은 효율성의 언어로 정당화된다. 필연적으로 기업의 일원은 직원을 수단, 그리고 대상으로 사용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기업은 하나의 법인격으로서, 자기존재의 존속을 위한 이익을 담보하지 않는 모든 행위에 대해 '비효율적'이라 판단해버리고 말기 때문이다.
누군가는 이렇게 반문할 것이다. ESG는요? 나는 이러한 질문에 결국 환경과 슬롯를 생각하는 경영학적 접근조차, 그것이 일정 부분 기업의 이익, 그리고 지속가능성을 담보로 하기 때문에 정당화되었다고 답할 것이다. 기업이 자선단체도 아니고 어찌 이익이 없는데 그런 것을 하겠는가?
하지만 나는 이러한 현실 속에서도 이번 글에서 인간을 인간으로 바라보고자 한다. 우리는 어떻게 이 오류에서 빠져나올 수 있을까? 우리는 어떻게 진화심리학적인 본능, 그리고 Homo Economicus라는 우리의 새로운 본능에 새겨진 집단 동질성 편향 그리고 칸트적 의무론(실천이성)에 반하는 이 모든 오류에서 해방될 수 있을까? 나는 말하고자 한다. 그 본능과 주변 환경에서 유리된 이성은 인간의 또 다른 능력이며, 이것이 우리를 오스트레랄로피테쿠스와는 달리 할 것이라는 걸. 이제 나는 그 방법론을 말하고자 한다.
그 방법론의 가장 첫 발걸음은 의심이다. 언제나 사람의 배경이 시사하는 현상을 의심해야 한다고 나는 말하고자 한다. 여기서 아주 주제넘게도 나는 자구적으로 2가지 '의심' 방법론을 짧게 소개하고 글을 끝내 버릴 것이다. 부연 설명도 안 할 것이다. 나는 쓰자마자 바로 잘 것이기 때문이다.
다만, 첫 번째 방법론은 남을 구하기 위한 존재론적 구분이며, 두 번째 방법론은 자신을 구하기 위한 실천이라는 점이 결국 내가 말하고자 하는 바일 것이다.
일단 첫째는 being for other과 being for itself의 구분이다. 현상으로 치환되기 마련인 타인의 시선 속의 존재와 그 존재가 진정으로 바라고 열망하고 기투하려는 나를 구분하는 것이다.
이 두 개가 다르다는 것을 인식하는 것만으로도 하나의 방법론의 거의 전부를 다한 것이라 감히 쓰고자 한다. 왜냐면 구분을 한다는 행위 자체에 이미 집단 동질성 편향에 대한 배제가 내재되어 있다는 것이다.
내가 being for itself로 기투하는 것 자체가 즉슨 타인도 기투할 수 있음을, 그리고 타인도 주체이며 집단성 안에서 묻어가는 존재가 아님을 인정하는 실천이다.
둘째는 자기에의 배려 방법론. 사람의 말과 보이는 것은 보고 듣고 느낄 수 있는 지층과도 같은 것이다. 하지만 보이지 않는 그 무엇인가, 일종의 칸트가 말한 물자체 개념을 가시적 이해를 위해 나는 도형으로 비유해 보기로 하였다.
만약 원이 있다면 지층은 원을 꽉 채우는 내접 사각형일 것이다. 하지만 사각형으로는 원을 채울 수 없다. 나머지 활꼴들이 남기 때문이다. 칸트는 내가 비유한 이 활꼴의 부분에 대해서는 인간 이성으로 규명할 수 없다고 말했다. 사실 내가 칸트의 이 개념을 활꼴로 표현한 걸 수도 있다. (사실 이게 맞는 말일 것이다.)
하지만 이에 내 생각에는 후대의 푸코가 자신의 권력 연구에서 이에 명명을 했다고 생각한다. 믿는 것 보이는 것이 권력-지식 관계에서 구성이 되었다는 것이다. 이 반원들의 존재가 미시물리학적 권력관계란 것이다.
우리는 태어나길 사람과 사람들 사이의 미시적 권력 규명하에 규정되어 버리길 반복하는 제약된 존재이다.
미시물리학적 작용으로도 이 반원, 즉 권력관계는 설명이 되는데, 활꼴과 지층은 끊임없는 작용과 반작용 개념하에 존재하며 공존하게 된다.
또한 이는 미분의 형상으로 존재하지만 (우리가 그것이 무엇인가 인지하기 어려운 상태성 하라는 것) 이는 실제로 인간이 이와 마주할 때 현실화되는 적분으로 실현된다.
하지만 이 옅은, 그리고 산개하는 개념들에 빈틈이 생길 것이란 건 필연이다. 뇌의 시냅스조차도 모양자체가 빈틈 있는 망사형 아닌가? 이 미시권력과 지층 간의 간격에 우리는 주목해야 한다. 그걸 포착하는 방법은 자기-지식-권력을 관통하는 실천이다.
관계성 속 종속된 개인은 드러냄으로써 존재의 가벼움을 이겨낸다.
인생을 예술작품으로 만들자.
맞다. 자기를 스스로 기술함으로써,
자기가 스스로 원하는 바대로 자기에의 배려를 한다는 것.
분명 지식과 권력과 자기를 관통하는 한 의심의 전략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