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심이 시리즈 10. 마지막 문장은, 안녕이 아니었다
오늘 영심이는 현관으로 들어왔다.
처음이었다.
여태 소파로, 냉장고 앞으로, 창문으로,
문도 안 두드리고 제멋대로 드나들던 녀석이
오늘은 얌전히 현관에 서서 신발을 벗었다.
"웬일이야. 초인종도 안 누르던 애가."
영심이가 씩 웃었다.
"오늘은 좀, 제대로 오고 싶었어."
나는 그 말이 조금 이상하게 들렸다.
영심이는 늘 그랬다.
내가 "Take your time." 하고 스스로를 다그치던 밤에 처음 찾아와,
"Whatever." 뒤에 숨은 진심을 들춰내고,
"I'm fine."이 얼마나 자주 거짓말이었는지 알려주고,
"Maybe." 앞에서 망설이던 나를 지켜보고,
"You got this."가 너무 시끄러울 때 슬쩍 볼륨을 줄여주고,
"Never mind." 뒤에 숨긴 상처를 못 본 척 안아주고,
"I miss you."를 밤늦게 데려오고,
어제는 "Let it go." 하며
내 손을 펴게 했다.
돌아보니 그 문장들은
전부 내가 삼키고 있던 말이었다.
영어라서 낯설었던 게 아니라,
내 언어로는 차마 못 꺼내서
잠시 남의 말을 빌렸던 것뿐이었다.
"영심아."
"응."
"너 오늘 뭐 들고 왔어?"
영심이는 이번에도
휴대폰 화면을 내 쪽으로 돌렸다.
거기엔 문장 하나가 떠 있었다.
See you.
나는 그 문장을 오래 바라보았다.
See you.
또 봐.
다음에 봐.
이상했다.
'안녕'이라는 말인데
어디에도 슬픔이 없었다.
"이제 가려고?"
내가 묻자
영심이가 신발코를 툭툭 찼다.
"어. 너 이제 혼자서도 문장 잘 들여다보더라."
나는 뭐라 대꾸하려다 말았다.
맞는 말이었다.
언제부터인가 나는
누군가의 "괜찮아"에서 괜찮지 않음을 읽고,
"됐어" 뒤의 서운함을 알아채고,
내 안에서 올라오는 감정에
얼른 뚜껑부터 덮지 않게 되었다.
영심이가 남기고 간 건
영어 문장 몇 개가 아니었다.
말 뒤에 숨은 마음을 들여다보는 습관.
그거였다.
"근데 왜 하필 See you야?"
영심이가 현관 문고리를 잡으며 말했다.
"Goodbye는 너무 무겁잖아.
다신 안 볼 사람한테 하는 말 같고."
"그럼 See you는?"
"또 볼 사람한테 하는 말이지."
나는 웃었다.
"또 올 거야?"
"글쎄."
영심이는 어깨를 으쓱했다.
"근데 있잖아.
나 같은 애는 보통 안 부를 때 오거든."
그 말이 맞았다.
영심이는 늘
내가 부르지 않은 밤에 왔다.
가장 지쳤던 밤,
가장 외면하고 싶던 밤,
아무에게도 말 못 한 마음이
손끝에 묻어나던 밤에.
그러니까 See you는
약속이라기보다
안심 같은 말이었다.
또 그런 밤이 오더라도
너는 혼자가 아닐 거라는.
영심이가 현관문을 열었다.
"영심아."
녀석이 돌아봤다.
"고마웠어."
영심이는 잠깐 나를 바라보더니
씩 웃었다.
그리고 손을 한 번 흔들었다.
"See you."
문이 조용히 닫혔다.
나는 한참을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이상하게 허전하지 않았다.
떠난 자리가 비어 있는 게 아니라,
그 자리에 무언가 남아 있는 느낌이었다.
괜찮지 않을 때
괜찮다고 서둘러 말하지 않는 것.
내 마음에서 올라오는 감정에
얼른 뚜껑부터 덮지 않는 것.
말보다 먼저
그 안에 있는 마음을 한 번 들여다보는 것.
영심이는 그렇게
내게 작은 습관 하나를 남겨두고 갔다.
나는 휴대폰을 열었다.
See you.
또 봐.
다음에 봐.
지우지 않았다.
밤이 깊었다.
창밖은 여전히
도시의 불빛으로 반짝였고,
나는 오랜만에,
아주 오랜만에
내 마음이 조용한 걸 느꼈다.
시끄럽게 비어 있는 밤이 아니라,
편안하게 고요한 밤이었다.
영심이는 안녕이라고 말하지 않았다.
또 보자고 했다.
나는 그 말을
오래 손에 쥐고 있었다.
이번엔,
놓지 않아도 괜찮았다.
— 쉼표 JEONGSEON
[작가의 말]
영심이는 한 번도 큰 소리로 말하지 않았습니다.
괜찮다는 말 뒤의 상처를,
보고 싶다는 말 뒤의 마음을,
놓아준다는 말 안의 다정함을 지나
마지막에는 "또 보자"는 인사를 두고 갔습니다.
그동안 영심이의 밤을 함께 걸어주셔서 고맙습니다.
언젠가 여러분에게도
말로 꺼내기 어려운 밤이 찾아온다면,
영심이가 두고 간 문장 하나가
조용히 옆자리를 내어주기를 바랍니다.
See you.
#영심이 #감성에세이 #SeeYou