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화산

풍경 대신 숲을 보여준 산

by진경수
“흥교마을에서 정상에 오른 뒤 같은 길로 돌아온다. 조망보다 숲이 오래 남은 산행이었다. 작은 방향표지와 굽은 우회로, 상처 입은 노거수는 앞만 보며 걷던 마음을 가까운 존재에게 돌려놓았다.”



DSCN6974.JPG태화산 정상/사진 진경수




정상 : 태화산 1,027.5m

출발 : 영월 흥교마을

거리 : 약 5.2km 왕복

주제 : 배려와 가까이 보기

산행일 : 2026. 9.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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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 작은 표지가 건넨 마음


DSCN6920.jpg배려의 마음/사진 진경수




“길을 알려준다는 것은 앞서 걷는 일이 아니라, 뒤따라올 사람을 위해 작은 마음 하나 남겨두는 일인지도 모른다.”

흥교마을을 벗어나자 부드러운 흙길은 이내 거친 돌길로 바뀐다. 누군가 나뭇가지와 돌 위에 남겨둔 글씨와 화살표가 갈림길마다 걸음을 붙든다. 이름도 얼굴도 모르는 사람이 남긴 표시는 작지만 든든하다. 길 위의 배려는 거창한 안내가 아니라, 뒤따라올 사람의 망설임을 조금 덜어주는 흔적이었다.



“나도 길을 잃은 누군가에게 한마디를 남길 수 있을까.”

앞서 걷는 일보다 더 어려운 것은 뒤에 오는 사람을 생각하는 일이다. 산에서 만난 작은 표지는 내가 세상에 어떤 흔적을 남기며 살아왔는지 묻는다. 한 사람의 다정한 말과 조용한 손길도 누군가에게는 길을 잃지 않게 하는 이정표가 된다.




DSCN6928.JPG참나무 숲길/사진 진경수




“천천히 걸을수록 숲은 하나의 풍경이 아니라, 나무마다 다른 숨결로 다가온다.”

참나무숲과 낙엽송숲을 지나며 빛의 결이 달라진다. 속도를 늦추자 한 덩어리의 초록으로만 보이던 숲에서 나무마다 다른 표정과 숨결이 드러난다. 빨리 지나갈 때는 풍경이었던 것이 오래 바라볼 때 비로소 하나의 존재가 된다.



“속도를 낮춘다는 것은 늦어지는 일이 아니라, 보이지 않던 것을 볼 수 있게 되는 일이다.”

산행의 걸음은 몸의 리듬을 넘어 마음의 시선을 바꾼다. 목표만 바라보면 길은 통과해야 할 거리가 되지만, 호흡을 고르면 길은 만나야 할 세계가 된다. 숲은 더 빨리 오르라고 재촉하지 않고, 지금 이 자리의 생명을 알아보라고 말한다.




02. 굽은 길이 숲을 지키는 방식



DSCN6940.JPG숲이 울창한 비탈길/사진 진경수




“이 굽은 길은 산과 사람이 서로를 조금 덜 다치게 하며 만나는 방식인지도 모른다.”

정상을 앞두고 길은 비탈을 곧장 치고 오르지 않고 숲 가장자리를 따라 굽이돈다. 안전을 위한 것인지, 숲을 보호하기 위한 것인지 정확히 알 수는 없다. 다만 돌아가는 길 덕분에 산도 사람도 상처를 덜 입는다. 빠른 길이 언제나 좋은 길은 아니며, 우회는 때로 함께 살아가기 위한 지혜다.



“이유를 모른다고 그 선을 넘어설 수는 없다.”

폐쇄된 길 앞에서 발을 멈추고 안내에 따라 우회한다. 경계의 이유를 모두 설명받지 못해도 지켜야 할 선이 있다. 세상의 규칙도 사람의 마음도 마찬가지다. 이해가 늦더라도 존중이 먼저일 때 관계는 오래 이어진다.




DSCN7006.JPG비탈길에서 능선길로 오르다/사진 진경수




“멀리서 걱정하던 길도 발밑에서는 한 걸음의 거리로 나뉜다.”

능선 너머 봉우리는 멀리서 볼 때 높고 막막하다. 그러나 걷기 시작하면 산은 다음 발을 놓을 자리만 내어준다. 한꺼번에 넘으려 할 때 두려운 일도 오늘의 한 걸음으로 나누면 감당할 수 있다. 산은 먼 목표를 바라보되, 발은 늘 지금의 자리에 두라고 가르친다.


하늘이 열릴 때마다 정상이라 기대했지만 길은 다시 이어진다. 실망은 오래가지 않는다. 보이지 않던 길이 새로 열렸기 때문이다. 도착이 늦어지는 시간에도 몸과 마음은 변하고 있었다. 오름의 뜻은 정상석에 닿는 데만 있지 않고, 그 길을 지난 뒤의 내가 어떻게 달라졌는지 알아보는 데 있다.




03. 멀리 보는 대신 가까이를 보다



DSCN6967.JPG나무의 숨결을 느끼다/사진 진경수




“정상에 오르면 멀리 보아야 한다고 생각했는데, 오늘은 가까이에 선 나무를 오래 바라본다.”

태화산 정상은 울창한 나무에 둘러싸여 먼 풍경을 넉넉히 내어주지 않는다. 대신 벗겨진 껍질과 구멍, 뒤틀린 가지를 품은 오래된 참나무 한 그루가 시선을 붙든다. 기대했던 조망이 사라진 자리에 가까운 존재의 시간이 들어온다.



“사람의 주름과 흉터에 살아온 날들이 남듯, 나무의 몸에도 이 산에서 견뎌온 세월이 새겨져 있다.”

상처는 흠이 아니라 지나온 계절의 기록이다. 나무는 말없이 자신의 몸으로 견딘 시간을 보여준다. 사람도 마찬가지다. 가까이 머물러 바라볼 때 비로소 그가 건너온 날들과 말하지 못한 아픔이 보인다. 태화산은 먼 풍경 대신 곁에 있는 생명을 오래 바라보게 했다.




DSCN6979.JPG태화산 정상의 노거수/사진 진경수




“같은 길을 되짚어 내려왔지만, 오를 때와 같은 길은 아니었다.”

올라갈 때는 정상만 바라보느라 지나쳤던 숲의 깊이와 빛이 하산길에서 새롭게 보인다. 길이 달라진 것이 아니라 바라보는 내가 달라졌다. 작은 화살표와 굽은 우회로, 상처 입은 나무 한 그루가 걸음의 속도와 마음의 방향을 바꾸어놓았다.


앞으로 나아가는 데 몰두하면 가장 가까이에 있는 사람의 마음을 지나치기 쉽다. 태화산에서 얻은 산행공부는 멀리 보는 능력보다 가까이 오래 바라보는 마음이었다. 삶으로 돌아가서도 곁에 선 사람의 숨결과 상처를 서두르지 않고 알아보는 일, 그것이 오늘 산이 남긴 숙제다.




DSCN6992.JPG태화산 하산길에서 저녁 빛을 만나다/사진 진경수




산이 남긴 질문


나는 앞으로 나아가느라, 내 곁에 이미 와 있는 어떤 마음을 지나치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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