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우리가 아닌 내 안의 길을 오르다
“제1주차장에서 병풍바위와 현수교를 지나 왕자봉에 오른 뒤 형제봉과 산성산, 북바위, 시루봉, 광덕산, 장군봉을 거쳐 구장군폭포로 돌아오는 종주길이다.
강천산은 흔들림 속에서 현재를 살아내는 법, 경계 너머의 전체를 바라보는 지혜, 끝까지 걸어온 자신을 믿는 마음을 가르쳐준다.”
정상 : 왕자봉 584m
출발 : 제1주차장
거리 : 약 17.4km 원점회귀
주제 : 현재와 도전
산행일 : 2025. 8. 23.
01. 흔들림 속에서 현재를 걷다
“걷는다는 것은 자연과 온몸의 감각을 나누는 일이다.”
신선교를 건너자 계곡물이 길동무가 되고 물소리와 새소리가 속세에서 가져온 번뇌를 씻어낸다. 맨발 산바카라로의 감촉을 따라 걷다 보면 생각보다 먼저 몸이 자연과 대화를 시작한다. 산행은 거리를 줄이는 일이 아니라 잊고 있던 감각을 되찾는 시간이다.
병풍바위의 물줄기 위로 잠시 무지개가 피어난다. 곧 사라질 것을 알기에 그 빛은 더 선명하다. 삶의 아름다움도 붙잡아 둘 수 있어서가 아니라 지금 바라볼 수 있기에 소중하다. 오래 머무는 일보다 주어진 시간에 어떤 빛을 남기는지가 더 중요하다.
“삶도 결국 흔들림을 건너는 일인지도 모른다.”
짙은 녹음 사이의 현수교에 오르자 발아래 깊은 계곡이 내려다보인다. 다리가 흔들릴 때마다 심장도 함께 요동친다. 두려움을 없앤 뒤에야 건널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흔들리는 채로 한 걸음씩 옮길 때 반대편에 닿는다.
왕자봉으로 이어지는 가파른 길은 과거와 미래를 생각할 여유를 주지 않는다. 지금의 호흡과 발끝, 심장박동에 집중하게 한다. 산은 멀리 있는 답을 찾기 전에 오늘 내딛는 한 걸음을 온전히 살아내라고 가르친다.
02. 경계를 넘어 전체를 바라보다
“산행은 결국 한 걸음씩 현재를 살아내는 일인지도 모른다.”
왕자봉 전망대에 서자 걸어온 길과 앞으로 걸어야 할 능선이 한눈에 들어온다. 먼 봉우리를 한꺼번에 넘을 수는 없다. 몸이 힘들 때는 마음으로 자신을 위로하고, 마음이 지칠 때는 두 발에 힘을 주며 지금의 한 걸음을 이어갈 뿐이다.
오르막 뒤에는 내리막이 있고 고단한 길 뒤에는 잠시 숨을 고를 평지가 나타난다. 힘겨움이 있기에 쉼은 달고, 가파른 길이 있기에 바람은 더 시원하다. 산길의 오르내림을 받아들이는 마음은 삶의 변화 앞에서도 중심을 잃지 않게 한다.
“어느 한쪽에 머무르지 않으면서도 양쪽을 함께 바라보는 것이 중도의 지혜다.”
금성산성 북문에 올라서니 순창과 담양을 가르는 능선이 오히려 두 지역을 하나의 풍경으로 품는다. 경계는 서로를 구분하는 선이면서 만나는 자리이기도 하다. 가까이에서는 나뉘어 보이던 것이 높이 올라 바라보면 서로 기대어 존재하고 있음을 알게 된다.
사람은 자신이 선 자리에서 본 장면을 전체라고 믿기 쉽다. 산은 한쪽의 경험만으로 세상을 판단하지 말라고 한다. 치우치지 않되 무관심하지 않고, 다름을 인정하되 연결을 포기하지 않는 시선이 함께 살아갈 길을 넓힌다.
03. 봉우리가 아닌 내 안의 길을 오르다
“산행의 끝에서 대견한 것은 힘겨운 순간에도 걷기를 멈추지 않았던 나 자신이다.”
연대봉과 북바위, 시루봉을 지나 광덕산으로 향하는 길에는 아직도 넘어야 할 봉우리가 이어진다. 갈 것인가 돌아설 것인가 망설이는 순간마다 자신을 비난하지 않고 먼저 다독인다. 용기는 두려움이 없는 상태가 아니라 두려운 마음을 데리고 다시 걷는 선택이다.
정상은 여러 번 나타났지만 산행은 그곳에서 끝나지 않았다. 산이 묻는 것은 몇 개의 봉우리를 올랐는지가 아니라 힘든 순간에 어떤 마음으로 다음 걸음을 내디뎠는가였다. 목적지보다 끝까지 걸어온 과정이 오늘의 나를 설명한다.
“산행은 봉우리를 오르는 일이 아니라 내 안의 길을 오르는 일이었다.”
장군봉을 내려와 선녀계곡에 닿자 팽팽했던 긴장이 풀린다. 힘겨웠던 순간도 망설였던 순간도 한 걸음씩 지나 여기까지 왔다. 지나온 시간이 길든 남은 시간이 짧든, 두 발로 걸을 수 있는 동안 새로운 삶을 향한 도전을 멈추지 않으려 한다.
구장군폭포의 물소리는 긴 산행의 피로를 씻어내고 산의 품으로 돌아왔음을 알린다. 산은 오르기 위해 만났지만 결국 나를 돌아보기 위해 걸었다. 삶에 지칠 때 다시 찾고 싶은 곳은 가장 높은 봉우리가 아니라 말없이 나를 품어준 자리다.
산이 남긴 질문
나는 목적지만 바라보느라 지금의 걸음을 놓치고 있지는 않은가
오늘 나는 내 안의 어떤 길을 오르고 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