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악산

길을 잃고 방향을 배우다

by진경수
“삼팔교에서 조무락골을 따라 중봉에 오른 뒤 다시 삼팔교로 돌아오는 길이다.
갈림길에서 벗어나 숲 속을 오래 헤맨 탓에 실제 걸음은 20km를 훌쩍 넘었다.
화악산은 길을 잃은 산객에게 멈추는 절제, 방향을 되찾는 판단,
다시 걸어가는 실천을 가르쳐주었다.”



DSCN6288.JPG화악산 중봉 정상/사진 진경수



정상 : 중봉 1,446m

출발 : 삼팔교

계획거리 : 약 13km 원점회귀

주제 : 길과 방향

산행일 : 2026. 8. 9.



화악산 등산지도.png





01. 맑은 물에서 나를 바라보다


DSCN6075.JPG조무락골/사진 진경수




“물은 숲을 만들고 숲은 길을 만들며 빛은 그 길을 걷게 한다.”

새벽의 조무락골은 깊은 숲과 맑은 물로 산객을 맞는다. 물소리에 걸음의 속도를 맞추자 마음속 잡념도 조금씩 가라앉는다. 자연은 혼자 길을 만들지 않는다. 물과 숲과 빛이 서로를 품고 이어질 때 비로소 한 사람이 걸어갈 길이 열린다.


산을 좋아한다는 것은 높은 곳에 오르는 일로 끝나지 않는다. 오늘 만나는 숲과 계곡을 후손도 누릴 수 있도록 지키는 일이 그 사랑의 다음 걸음이다. 탄소배출을 줄이고 자연을 덜 훼손하는 작은 실천이 산을 향한 마음을 삶의 태도로 바꾼다.




DSCN6151.JPG복호동폭포/사진 진경수



“마음속 욕심과 잡념을 비워야 비로소 진정한 나를 볼 수 있다.”

맑은 물아래 돌과 숲의 그림자가 흔들린다. 물이 맑을수록 그 안의 모습이 온전히 드러나듯, 마음도 덜어낼수록 자신의 얼굴을 정직하게 비춘다. 산이 건네는 고요는 새로운 것을 채우라는 권유가 아니라 이미 마음에 쌓인 것을 잠시 내려놓으라는 초대다.


복호동폭포의 물은 오랜 세월 같은 자리를 지나며 바위를 깎아왔다. 한 번의 큰 힘보다 멈추지 않는 작은 흐름이 단단한 것을 바꾼다. 오늘의 한 걸음은 짧아 보여도 그것이 쌓이면 삶의 모양을 바꾸는 시간이 된다.




02. 길을 잃었을 때 방향을 찾다


DSCN6229.JPG길을 잃고 방향을 설정하고 길을 오른다/사진 진경수



“길을 잃었을 때 가장 먼저 찾아야 할 것은 길이 아니라 방향이다.”

등산 리본을 따라 계곡으로 들어섰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길의 흔적이 사라진다. 되돌아가라는 듯 뱀이 길을 지키고 있었고, 미로 같은 숲에서는 통신마저 끊겼다. 조급하게 아무 길이나 찾을수록 숲은 더 깊어졌다. 먼저 해야 할 일은 현재 위치를 가늠하고 능선의 방향을 정하는 것이었다.


삶에서도 앞이 보이지 않으면 움직이는 일 자체를 답으로 여기기 쉽다. 그러나 방향을 잃은 속도는 더 먼 곳으로 데려간다. 잠시 멈춰 내가 어디에 있는지 살피고 기준을 다시 세울 때, 비로소 한 걸음은 길을 되찾는 움직임이 된다.



DSCN6279.JPG화악산의 최고봉인 신선봉 능선/사진 진경수



“길이 아니면 가지 말고 길을 잃었다면 멈추어 방향을 잡아야 한다.”

정글처럼 거친 숲에서 한 걸음을 옮기면 두 걸음을 미끄러졌다. 체력이 바닥나고 스마트폰 배터리도 줄어들자 만일의 상황에 피신할 바위틈까지 눈여겨본다. 산에서는 호기심보다 안전이 먼저다. 이정표와 흔적이 분명하지 않은 길을 피하는 절제가 자신을 지키는 가장 현명한 판단이다.


세 시간여 만에 정규 등산로를 만난 순간, 반가움에 주저앉을 만큼 긴장이 풀린다. 길을 되찾았다는 사실은 단순히 위치를 확인했다는 뜻이 아니다. 두려움 속에서도 방향을 놓지 않았고, 끝내 스스로를 안전한 자리로 이끌었다는 안도였다.




03. 정상에서 지나온 길을 읽다



DSCN6307.JPG이웃한 석룡산 능선/사진 진경수



“정상은 지나온 길을 비로소 온전히 바라보게 하는 자리인지도 모른다.”

정규 등산로를 찾은 뒤에도 정상으로 갈 것인지 하산할 것인지 선택해야 했다. 천천히 첫 조망터까지만 가보자는 마음으로 다시 걷는다. 사람을 만나 힘을 얻고, 거친 길에서 핀 야생화에 위로받으며 중봉에 닿는다. 산은 힘든 길 곳곳에 그 길을 견디게 하는 작은 위로도 함께 심어놓았다.


중봉에 서자 헤매고 멈추고 다시 걸었던 시간이 한눈에 들어온다. 정상은 고생을 지워주는 곳이 아니라 지나온 선택을 이해하게 하는 자리다. 오르며 보지 못했던 길의 의미가 멀리 바라보는 순간 하나의 이야기로 이어진다.




DSCN6390.JPG쌍룡폭포/사진 진경수




“길을 찾았다면 다시 묵묵히 걸어야 한다.”

방향을 되찾고 나니 남은 5km의 계곡길은 더 이상 미로가 아니었다. 발바닥이 아프고 해가 기울어도 알고 있는 길은 그저 걸어가면 되는 길이었다. 끝이 보이지 않더라도 방향이 옳다면 한 걸음씩 나아가 언젠가 닿을 수 있다.


오늘의 알바 산행은 화악산이 내게 가장 많은 것을 가르쳐준 산행이 되었다. 길을 잃지 않는 완벽함보다 잘못된 선택을 알아차리는 마음이 중요하다. 멈추어 방향을 고치고 다시 걸을 수 있다면, 헤맨 시간도 삶을 지키는 공부가 된다.




DSCN6187.JPG바위 사이로 은빛 물결이 부서진다/사진 진경수



산이 남긴 질문


나는 길을 잃었을 때 더 서두르고 있지는 않은가

지금 나에게 먼저 필요한 것은 길인가 방향인가




이전 16화내연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