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을 깨우며 마음을 밝히는 길
오색에서 대청봉에 오른 뒤 중청봉과 끝청봉을 지나 한계령으로 내려선다.
가장 짧지만 가파른 오색 길과 긴 서북능선은
정상의 높이보다 마음의 속도를 살피게 한 산행이었다.
정상 : 설악산 대청봉 1,708m
출발 : 오색
도착 : 한계령
거리 : 약 15.7km
주제 : 조급함과 자기 걸음
산행일 : 2026. 5. 22
01. 어둠 속에서 내 걸음을 밝히다
“한 줄기 불빛이 발길을 밝히듯, 힘겨운 발걸음 속에서 나는 스스로의 자명등을 켠다.”
새벽 네 시, 남설악탐방지원센터를 지나 헤드랜턴을 켠다. 조금 전까지 내린 비로 돌길은 젖어 있고 계곡물은 어둠을 깨우듯 굉음을 낸다.
불빛은 멀리까지 가지 않는다. 겨우 다음 발을 놓을 자리만 보여줄 뿐이다. 삶도 그러하다. 먼 훗날을 모두 알지 못해도 지금 디딜 한 걸음이 보이면 길은 이어진다.
“다른 사람의 속도가 내 길의 기준이 될 수는 없다.”
뒤따르던 불빛들이 하나둘 앞서 가지만, 마음은 서두르지 않는다. 앞사람을 따라잡는 일이 산행의 목적은 아니다. 산은 남의 속도에서 벗어나 내 호흡을 되찾을 때 비로소 마음을 연다.
“내 걸음의 속도는 내 뜻대로 재촉할 수 없다. 인연이 닿는다면 풍경도 때가 되어 모습을 드러낸다.”
한 시간이 흐르자 어둠은 서서히 물러난다. 땀으로 젖은 몸에 설악의 찬 공기가 닿고, 쉼터에서 만난 산객들의 짧은 인사가 다시 걸을 힘을 보탠다.
정상의 운해가 장관이라는 말을 들어도 이미 내 걸음은 재촉한다고 빨라질 수 있는 단계가 아니다. 풍경도 인연도 붙잡으려 하면 오히려 멀어진다. 때가 닿으면 스스로 모습을 드러낸다고 믿으며 발을 옮긴다.
“산은 고비를 없애주지 않았다. 다만 견뎌낸 사람에게 다음 걸음을 건넸다.”
설악은 길을 쉽게 내어주지 않았지만, 멈추어 숨을 고르는 사람에게 다시 시작할 만큼의 여백을 건넸다. 어둠 속의 오름은 길을 밝히는 일이면서 동시에 마음의 두려움을 조금씩 걷어내는 일이었다.
02. 높은 곳에서 나를 낮추다
“생과 사는 멀리 떨어져 있지 않았다. 고사목과 생목은 한 하늘 아래 나란히 서 있었다.”
정상 가까이에서 고사목과 생목이 한자리에서 숨 쉰다. 삶과 죽음은 서로 등을 돌린 두 세계가 아니라 한 공간에서 이어지는 숨결이었다. 운해도 피어오르고 흩어지기를 되풀이한다. 머물지 못하는 생각과 감정처럼 모든 것은 잠시 나타났다가 제자리로 돌아간다.
“정상은 도착의 기쁨보다 내가 무엇을 붙들고 올라왔는지를 돌아보게 하는 곳이다.”
거센 바람을 거슬러 해발 1,708m 대청봉에 선다. 운해 위에 솟은 봉우리들은 말없이 자리를 지킨다. 높은 곳은 나를 높이기보다 오히려 낮춘다. 발아래 펼쳐진 장대한 산줄기 앞에서 욕심은 작아지고, 여기까지 이르게 한 사람들의 마음은 더욱 크게 다가온다.
“멀리서 평범해 보이는 대청봉은 가까이 다가설수록 준엄한 깊이를 드러냈다. 참된 크기도 이와 같을 것이다.”
대청봉에서 중청봉 쪽으로 내려서면 공룡능선과 용아장성이 운해 사이로 모습을 드러낸다. 가까이에서는 준엄했던 대청봉도 멀어질수록 나지막한 동산처럼 보인다. 그러나 오색의 가파른 돌길을 몸으로 지나온 사람은 그 부드러운 윤곽 안에 얼마나 깊은 길이 숨어 있는지 안다.
사람도 그러할 것이다. 참으로 큰 사람은 자신의 크기를 앞세우지 않는다. 넉넉한 품과 절제, 오래 다스린 마음은 겉으로 요란하지 않다. 산을 가까이 걸어본 뒤에야 그 깊이를 알게 되듯, 사람의 진가도 곁에서 시간을 건넌 뒤에야 비로소 드러난다.
03. 끝까지 내 걸음을 잃지 않을 것
“한계령은 지명이 아니라 내 체력과 인내의 경계를 묻는 길로 다가왔다.”
중청봉을 지나 서북능선에 들어서자 길은 다시 오르내린다. 내려가는 길이니 수월하리라는 기대는 곧 착각이 된다. 거친 너덜길과 계단 앞에서 체력은 바닥을 드러낸다. 무릎을 지키기 위해 속도를 낮추고 숨을 고른 뒤 다시 한 걸음을 내딛는다.
“완주는 남보다 빨리 도착하는 일이 아니라, 끝까지 내 걸음을 잃지 않는 데 있었다.”
석양빛을 받은 남설악의 기봉들을 지나 한계령에 닿는다. 돌이켜보면 오늘의 산행은 대청봉이라는 높은 곳에 닿은 일이 아니라 내 안의 두려움과 조급함을 지나온 일이었다. 산은 가장 힘든 순간에도 나를 재촉하지 않았다. 다만 내 몸의 소리를 듣고 내 몫의 한 걸음을 끝까지 이어가라고 일러주었다.
“오늘의 산행은 험준한 길을 지난 하루가 아니라, 두려움과 조급함을 넘어 조금 더 단단한 나에게 이르는 길이었다.”
아침 어둠 속에서 첫발을 내디뎠던 산은 다시 저녁의 적막으로 돌아간다. 나는 설악의 깊은 품에 하루를 맡겼다가 사람 사는 세상으로 발을 돌린다. 산행은 정상에서 끝나지 않는다. 무사히 내려와 사람 곁으로 돌아갈 때 비로소 한 번의 산행이 완성된다.
오름에서 얻은 용기와 하산에서 배운 절제를 일상으로 가져오는 것, 그것이 산행공부다. 설악은 가장 높은 곳에서 나를 낮추었고, 가장 긴 길에서 내 걸음을 되찾아주었다.
산이 남긴 질문
나는 지금 누구의 속도를 좇고 있으며, 어떤 조급함을 내려놓아야 하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