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끼가 왕이 된 숲
“장구목이 입구에서 이끼 계곡을 따라 정상 상봉에 오른 뒤 같은 길로 돌아온다. 맑은 물과 오래된 숲, 된비알과 주목은 채우는 일에 익숙한 마음을 비우고 자연과 더불어 살아가는 시간을 가르쳐주었다.”
정상 : 가리왕산 상봉 1,561.8m
출발 : 장구목이 입구
거리 : 약 8.2km 왕복
주제 : 비움과 공존
산행일 : 2026. 5. 30
01. 비어 있기에 생명을 품는다
“일에서 반드시 성과를 만들어야 한다는 강박은,
스스로를 완벽하게 증명할 필요가 없는 자연 앞에서 물보라처럼 흩어진다.”
세 시간을 달려 도착한 장구목이 입구에서 계곡의 신선한 공기와 맑은 물소리를 만난다.
숲 사이로 스며든 아침 햇살과 새소리가 잠든 산을 깨운다.
늘 결과로 자신을 증명하려 했던 마음도 이곳에서는 힘을 잃는다.
자연은 무엇을 이루었는지 묻지 않고, 있는 그대로의 나를 깊고 넓은 품으로 받아준다.
“골짜기는 비어 있기에 모든 것을 받아들이고, 비어 있기에 끊임없이 생명을 길러낸다.”
바위 사이를 흐르는 물은 이끼와 작은 생명을 키운다.
노자가 말한 곡신처럼 골짜기의 힘은 비어 있음에서 나온다.
삶도 채우는 일만으로 깊어지지 않는다.
불필요한 욕심과 집착을 덜어낼 때 다른 사람과 새로운 생각이 들어올 자리가 생긴다.
“배움은 날마다 채우는 것이고, 도는 날마다 비우는 것이라 했다.”
배움은 모르는 것을 채우게 하지만, 지혜는 무엇을 내려놓아야 하는지 알게 한다.
채움과 비움은 서로 반대가 아니다.
배워서 삶의 폭을 넓히고, 비워서 마음의 깊이를 만드는 두 걸음이 함께 갈 때 사람은 흔들리지 않는다.
“시간을 잊은 걸음은 느긋하고, 그 느긋함은 마음에 넉넉한 여백을 만든다.”
이끼 계곡에서는 오르는 시간보다 머무는 시간이 길어진다.
바위마다 내려앉은 초록과 서늘한 물기 앞에서 말은 줄고 생각도 고요해진다.
산이 묵묵히 제 시간을 살아가듯, 세상의 소란 속에서도 자신의 길과 시간을 잃지 말라는 오래된 이야기가 바람을 타고 건너온다.
02. 느린 걸음으로 나를 만나다
“산은 늘 그 자리에 있겠지만, 그 산을 찾아갈 수 있는 시간은 당연하지 않다.”
계곡과 헤어진 뒤 허리를 세운 돌길이 시작된다.
호흡은 가빠지고 종아리는 묵직한 신호를 보낸다.
몇 걸음마다 멈춰 숨을 고르며 문득 앞으로 얼마나 더 산을 찾을 수 있을지 생각한다.
산은 오래 남아도 우리의 몸과 시간은 유한하다.
오늘 걸을 수 있다는 사실 자체가 이미 감사의 이유다.
“오래도록 산을 만나기 위해서는 건강 또한 중요한 산행 준비물이다.”
장비를 챙기듯 몸을 돌보는 일도 산행의 일부다.
무리한 속도보다 오래 걸을 수 있는 호흡을 선택해야 한다.
건강은 정상에 빨리 오르기 위한 수단이 아니라, 사랑하는 산과 사람 곁에 더 오래 머물기 위한 삶의 바탕이다.
“천천히 걸어야 비로소 산도, 나 자신도 만날 수 있다.”
된비알은 발아래와 내면으로 시선을 모은다.
빠른 걸음은 풍경만 스쳐 갈 뿐 마음에 닿지 못한다.
오래된 주목은 서두르지 않고도 제 자리를 지키며 수백 년을 살아왔다.
그 침묵 앞에서 속도를 줄이자 거친 숨 사이로 내 몸의 목소리와 마음의 번뇌가 하나씩 들리기 시작한다.
정상에 대한 생각을 내려놓고 한 걸음에 집중하니 어느새 장구목 정상삼거리에 닿는다.
멀게만 느껴지던 능선은 조급함을 버린 뒤에야 가까워졌다.
삶의 큰 고비도 한꺼번에 넘으려 하면 두렵지만, 지금 감당할 한 걸음으로 나누면 길이 된다.
03. 훼손을 지나 다시 숲으로
“가리왕산은 훼손과 복원의 시간을 모두 견디며, 자연이 얼마나 질기고도 느리게 스스로를 회복하는지 보여준다.”
해발 1,561.8m 상봉에 서면 중봉과 하봉의 능선이 시원하게 열린다.
거대한 행사가 산을 스쳐 지나간 뒤, 숲은 다시 자신의 호흡을 찾아가고 있다.
회복은 상처가 없었던 때로 되돌아가는 일이 아니다.
상처를 품은 채 생명의 방향으로 조금씩 나아가는 일이다.
“이번 산행은 누구보다 먼저 정상에 오르기 위한 경쟁이 아니었다.”
계곡의 물소리와 이끼의 초록, 숲의 향기와 주목의 침묵에 귀 기울이는 동안 경쟁의 마음은 옅어졌다.
정상은 남보다 먼저 차지하는 자리가 아니라, 길에서 만난 존재들을 되돌아보는 자리였다.
함께 살아가는 세상에서는 빠름보다 공존이 더 오래 남는다.
“산은 많은 것을 내어주지만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는다. 다만 추억은 가져가고 발자국만 남기라고 부탁한다.”
천천히 왔던 길을 되짚어 내려간다.
오를 때 지나친 풍경이 새 얼굴로 다가온다.
물과 이끼, 숲과 주목은 서로의 자리를 빼앗지 않고 긴 시간을 함께 살아왔다.
그 공존의 질서 앞에서 내가 세상에 남기는 흔적을 돌아보게 된다.
가리왕산에서 얻은 산행공부는 더 많이 소유하는 법이 아니라 덜 차지하며 함께 사는 법이었다.
마음을 비워 다른 생명이 머물 자리를 내어주고, 서두르지 않는 걸음으로 몸과 자연의 시간을 존중하는 것.
그렇게 살아갈 때 삶도 하나의 깊고 푸른 숲이 된다.
산이 남긴 질문
나는 무엇을 더 채우려 애쓰고 있으며, 무엇을 비워야 다른 생명과 함께 살아갈 수 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