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추(立秋), 길을 잃은 계절

폭염 속, 우리가 밀어낸 계절의 시간

by숨결biroso나


우리가 밀어낸 계절의 시간



달력은
먼저 가을을 넘겼다.

나는 창문을 열어
바람을 기다렸고,

들어온 것은
한숨 식은 공기가 아니라


낮의 끝까지
품고 온 뜨거운 숨이었다.


매미는, 아직
여름을 놓지 못한 목소리로
나무를 흔들고,

아스팔트는
밤이 되어도
태양을 품은 채 식지 못했다.


계절은
길을 잃은 것일까.


아니면


우리가
계절이 머물던 자리를
조금씩 지워 온 것일까.

그늘 하나가
사라질 때마다

바람은
잠시 쉬어 갈 곳을 잃고,

나무 한 그루가
사라질 때마다

가을은
조금 더 멀어지고 있었다.



늦은 것은
가을이 아니라
우리의 기다림이었고,

식지 않은 것은
태양만이 아니라

조금 더
편리해지려 했던
우리의 이기심이었는지도 모른다.



입추 (立秋), 가을의 시작


창문을 열었을 때
누군가의 마음처럼
조용한 바람 하나가

먼저
들어왔으면 좋겠다.

계절은 언제나
바람보다 먼저
사람의 마음에서 시작되니까.

사라진 것은 계절이 아니라
계절이 머물던 풍경이었다


달력은
오늘을 가을의 시작이라 적어 두었다.


괜히
창문을 열어 보았다.

혹시
바람은 달력을 먼저 읽었을까 싶어서.

하지만
방 안으로 들어온 것은
하루 종일 도시를 떠돌던 뜨거운 숨이었다.


매미는
여전히 여름 한가운데에서 울고,

가로수는
짙은 그늘 하나 내어주지 못한 채
햇볕을 고스란히 품고 있었다.




어릴 적 입추가 생각났다.

저녁은
낮보다 먼저 식어 갔고,

감나무 잎은
누가 알려주지 않아도
조금씩
계절을 준비하고 있었다.

그때는
바람이 먼저 계절을 데려왔고,

사람은
그 뒤를 천천히 따라가기만 하면 되었다.



언제부터였을까.

창문을 열어도
바람보다
달궈진 벽이 먼저 들어오고,

흙 냄새보다
뜨거운 아스팔트의 숨이
계절을 가로막기 시작한 것은.


나무가 서 있던 자리에는
유리창이 빛을 품었고,

그늘이 머물던 자리에는
뜨거운 열이
밤이 되어서도 떠날 줄 몰랐다.

아무도
계절을 쫓아낸 적은 없는데.

우리는
조금씩 그늘을 줄이고,

조금씩
바람이 쉬어 갈 자리를 줄이고,

조금씩
계절이 머물던 풍경을 욕심으로 채워 왔다.



입추는
올해도 제때 왔는데,

가을만
길을 잃은 것 같았다.

오늘은
오지 않는 바람을 기다리기보다,

누군가에게
잠시라도
그늘이 되어 주는 사람이고 싶다.

나무 한 그루는
하루아침에 숲이 되지 못하지만,

숲은
언제나
나무 한 그루에서 시작되었으니까.

언젠가 입추라는 말보다, 먼저 바람이 가을을 데려오는 날이 다시 우리 곁에도 찾아오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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