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된 피아노와 오솔길

by해윤이

청소를 하다가 오랫동안 거실 한쪽을 지키고 있는 피아노가 눈에 들어왔다.


며칠 전 정성스레 빨아 빳빳하게 말린 하얀 레이스커버를 깔아주었는데. 그 아래 묵묵히 자리를 지키는 어두운 갈색빛의 피아노는 오늘따라 유독 그 모습이 외로워 보였다. 피아노 위쪽 벽면에는 데이비드 호크니의 그림(image_320b5b.jpg)이 걸려 있다. 푸른 하늘 아래 구불구불하게 뻗은 오솔길과 생동감 넘치는 나무들, 그리고 길 위로 길게 드리워진 보라색 그림자가 눈부시게 선명한 작품이다. 그림 속 길은 저렇게 활기차고 아름다운데, 피아노는 오늘따라 유난히 쓸쓸해 보였다.


나는 의자 밑에 넣어두었던 빛바랜 악보를 꺼내 오랜만에 건반 위에 손을 올렸다. 혹시 그간 습기를 먹지는 않았을까 걱정스러운 마음에 모든 건반을 하나씩 꾹꾹 눌러보았다. 서른 해를 넘긴 피아노는 내 염려가 무색할 만큼, 언제나처럼 맑고 고운 소리를 내어주었다.


피아노를 바라보고 있으면 수많은 추억이 파도처럼 밀려온다.


요즘 이사한 내 친구는 집에 피아노 놓을 자리가 없다며 결국 처분했다고 한다. 당근마켓 같은 중고 거래 앱을 봐도 피아노 '무료 나눔' 글이 상당한 비중을 차지한다. 예전에는 피아노 가격이 워낙 비쌌던 터라 중고 가격도 꽤나 높았는데, 참 격세지감이다.


내가 결혼하기도 전, 일찍 가정을 꾸린 한 친구는 딸아이 피아노를 사줘야 하는데 돈이 부족하다며 내게 150만 원을 빌려달라고 한 적이 있었다. 40년 전의 150만 원은 웬만한 온라인 게임인의 몇 달 치 월급에 해당하는 큰돈이었다. 그만큼 그 시절 피아노는 부의 상징이자 자식에게 주고 싶은 최고의 선물이었다.


그 시절엔 아이를 낳아보아야만 성별을 알 수 있었다. 나는 첫아이로 딸을 낳았다. 두 달간의 짧은 출산휴가가 끝나고 은행에 복직했을 때, 내가 가장 먼저 한 일은 딸아이에게 피아노를 사주기 위한 '5년 만기 적립식 예금'을 가입한 것이었다. 그렇게 정성을 모아 딸이 여섯 살이 되던 해, 나는 무려 3백만 원이 넘는 거금을 들여 피아노를 사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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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하루 경이로운 삶을 기록하는 사람. 23년째 교실 밖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며 배움의 현장을 지켜왔고, 그 시간 속에서 발견한 삶의 이야기들을 글로 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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