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인생 최고의 처방전

by해윤이

"요즘 얼마큼 걸어?"

"음, 산에 약수 뜨러 가는 거리만큼요."

"그러면 내일부터는 그 거리보다 딱 두 배만큼 걸어봐."


오늘 문득, 내가 30대 초반에 근무하던 은행 근처 약국의 약사님이 생각났다.


결혼하고 아이를 가진 뒤에도 은행에 다녔다. 그 시절에는 결혼한 여직원에게 그리 관대하지 않았다. 나는 지점에서 근무하다 결혼했다는 이유만으로 출장소로 계이동(발령)이 났다. 설상가상으로 임신 후 지독한 입덧이 시작됐다. 하루 종일 밥은커녕 물 한 모금조차 삼킬 수가 없었다.


출장소는 마침 시장 안에 있었다. 점심시간이 되면 속을 달래려 시장통으로 나갔다. 그 수많은 음식 중 유독 내 눈에 들어온 것은 주황색 당근이었다. 오직 생당근 몇 조각만이 겨우 입에 들어갔다. 그러던 어느 날, 퇴근길에 백화점에 들렀을 때였다. 매장에 들어서기도 전에 아래가 뜨거워지는 불길한 느낌이 들었다. 얼른 화장실로 달려갔지만 이미 속옷은 붉은 피로 낭자해 있었다. 절박한 하혈이었다.


그날 이후 일주일간 병원에 입원해야 했고, 출근했을 때 나는 다시 지점 대부계로 복귀해 있었다. 밤늦게까지 서류를 붙잡고 씨름해야 하는 고된 일이었지만, 사람을 덜 상대하니 그나마 견딜 만했다. 그렇게 버텨내며 감사하게도 첫아이를 무사히 출산했다.


하지만 육아와 온라인 게임 생활을 병행하기에 내 체력은 턱없이 부족했다. 출산 후 내 몸은 고작 1km 남짓한 거리도 걸어가지 못해 택시를 잡아타야 할 정도로 망가져 있었다. 길가에서 택시를 세울 때마다 남편은 대놓고 핀잔을 주진 않았지만, 얼굴에는 늘 못마땅한 기색이 역력했다.


네 살 된 딸아이의 손을 잡고 집 뒤편 약수터까지 걸었다. 불과 몇백 미터밖에 안 되는 그 거리를 몇 번이나 쉬어가며 겨우겨우 다녀오던 날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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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하루 경이로운 삶을 기록하는 사람. 23년째 교실 밖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며 배움의 현장을 지켜왔고, 그 시간 속에서 발견한 삶의 이야기들을 글로 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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