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실
화구를 정리하고 화장실로 향한다. 거울 속 얼굴들 사이사이로 슬쩍 확인한다. 번들거리는 얼굴이 거뭇거뭇해져 있다. 4B연필은 손뿐만 아니라 콧등이나 이마, 귓바퀴 같이 상상치 못한 부위까지 흔적을 남긴다. 버스 손잡이에 검은 자국을 남기지 않기 위해 시커메진 손만 씻어내고 나선다. 사실 흑연가루가 군데군데 묻어있는 모습이 마음에 든다. 화실에 다니는 입시생이라는 걸 어느 누군가에게 티 내고 싶다. 여전히 부끄럼은 많았지만, 화실을 오가며 점차 다른 내가 되어가는 걸 느낄 수 있었다.
양 쪽 무릎은 한결같이 꼭 맞닿아있다. 꼬꾸라지지 않게 버텨주던 관절들도 여전히 꼭꼭 접힌 그대로이다. 하지만 예전과 달라졌다. 익숙한 의자가 이끄는 대로 얼키설키 꼬인 채, 힘없이 늘어져 있지 않다. 온몸이 보드랍게 펼쳐지며 떠오를 듯하다. 점잖은 엉덩이와 촐싹 맞은 발바닥까지 합심하여 나를 겨우 끌어내린다. 허리는 위아래로 펼쳐지고 어깻죽지는 활짝 젖혀져있다. 하늘을 향해 뻗어 나갈 듯, 자유로이 양팔을 내젓는다. 위태롭게 매달려있던 머리통이 이제는 목 위에 단단히 박혀있다.
화실에서는 편안하게 앉아 마음껏 크게 숨 쉴 수 있었다. 예전처럼 긴장하고 자바카라하며 한없이 쳐져있지 않았다. 그림을 배우는 첫날, 우스꽝스럽게 어깨를 털어내며 과장되게 큰 호흡을 해보이던 원장 선생님. 자신을 따라 긴장감을 내려놓으라는 진지한 말씀을 아로새겼다. 원하는 선 하나를 똑바르고 정확하게 긋기 위해서라고 했지만, '긴장 풀기'는 나에게 꼭 필요했고 그 후에도 수많은 것들과 이어졌다. 긴장도가 높은 일상에서 안정감을 찾는 일은 무언가를 위한 준비 과정이 아니었다. 내가 나에게 꼭 챙겨줘야 하는 일이 되었다. 화실에선 사지를 활짝 펼쳐도 전혀 어색하지 않았다. 공중도덕만 지킨다면 대부분의 것들이 허용되는 곳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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