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오기(思悟期)

대학 생활 ;생각하고 깨우치며 어른이 되어가는 시기

bygrassrain


그 당시를 떠올려 보면 볼수록 경이롭다. 기적이라고 감히 칭할 수도 있겠다. 바로 수능 전 날의 나라면 감히 상상하지도 못할 뜻 밖의 용기와 행동력, 그리고 상황을 반전시켜 버린 발상은 이제껏 내 인생 통틀어도 그때, 단 한 번뿐이다. 열아홉 나에게 무언가 들어와 꽉 들어찼다. 막연했던 미술 전공에 대한 선망을 아주 명명백백한 현실로 손쉽게 만들어 버렸다. 디자인학과에 일 년 늦게 진학한 일은 살아온 인생에서 가장 잘 만들어낸 선택이며 결과이다.



이렇게 마무리 지으면, 사실은 좀 찝찝하다. '자발적인 재수 생활 끝에 미술 대학에 무사히 입학했고 가장 멋진 성과를 이룬 과거다' 라기에 여느 대학생들과 매우 달랐다. 인생 최고의 희노애락이 모두 담겨있다고도 표현할 수 있겠다. 매우 다사다난했다. 사춘기가 뒤늦게 왔다고 설명하기에 좀 많이 억울하다. 진실과 의견을 나누고 따져가며, 긴 시간 동안 간추리고 선별한 이야기들을 덧대고 이어 붙여야 한다. 구차하고 졸렬한 부연 설명들이지만, 여러 입장들을 고려해 보았을 때 오해 없이, 속시원하게 이야기를 끝 마칠 수 있겠다.



일단 수능을 망치고 온 고3이 결과를 따져보지도 않고 재수생이 되겠다는 말을 부모님은 쉽게 받아들일 수 없었다. 게다가 미술 전공은 아주 뚱딴지같은 소리였다. 수치심과 좌절감에 충동적으로 입으로 뀐 방귀쯤으로 치부하는 듯했다. 그저 공부를 덜하고 대학을 가기 위한 적당한 핑곗거리를 찾아내 요령 피우는 듯이 바라보았다. 수능 날 쏘아 올린 거대하고 화려한 불꽃에 비해, 미술 대학에 대한 마음을 표현할 방법도 묘안도 떠올리지 못했다. 온전히 내가 선택한 재수생활인데도, 매일매일이 억울했다. 하지만 이대로라면 미대에 갈 수 있을 거라는 것만 생각하기로 했다. 어떤 식으로 왜곡해서 받아들여도 내가 아니니 상관없다고 억지다짐을 했다. 그림을 그릴 수 있고, 배울 수도 있으니 됐다. 정말 충분한 일이다. 다른 사람들이 어찌 생각하든 아무래도 상관없다. 결국에는 괜찮을 거다. 내 안에 쓰라리게 새기고 아리도록 되씹어야 했다.

재수 생활을 시작하고 집에서 투명 인간이 된 시점, 나 자신의 무모한 도전을 원망했고 잠시 후회했다. 무턱대고 부모에게 폭탄을 내던진 나는 독립운동가가 아니었다. 파렴치한 매국노였다. 열원을 바라지도 않았지만 아무도 지지해주지 않았다. 메마른 공기만 내 주위에 한참 맴돌았다. 그 와중에 지나가기 어려운 슬럼프를 넘겨야 할 때도, 더 높게 오르지 못하는 그림 실력을 확인하며 비관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림에 집중할 때만큼은 뜨끈한 열기로 틀림없이 채워졌다. 화실에서 덥혀온 온기로 하루치 밤을 겨우 지새우며 일 년을 보낼 수 있었다.


하지만 대학 문에 들어가는 첫 발부터 순조롭지 못했다. 과정은 물론, 결과도 내가 꿈꾸고 상상하던 대로 이루어진 것은 하나 없었다. 내가 꿈꾸고 목표했던 대학은 물론, 미술 실기를 인정받는 것 또한 실패다. 아무리 ‘소묘 천재’, ‘구도의 여왕’이란 소리를 일 년 내내 화실에서 들었어도 실기로 미술 대학에 합격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내 그림 실력은 어디에서도 공식적으로 인증받지 못했다. 소묘만큼은 잘 해낼 수 있는 분야라고 믿어왔던 나는, 또 실망하고 움츠러들었다. 심지어 한동안 떳떳하게 미대생이라 말하기도 부끄러웠다. "그림을 잘 그리시겠네요?"라는 질문에 자신 있게 "네"라고 말할 수 없는 미대생이 되었다.

미술로 대학에 갈 거라며 뒤늦게 미술을 시작한 나를 향하던 화실 사람들의 눈빛들이 떠올랐다. 결국엔 그들의 직감과 예측이 사실이 되었음을, ‘나도 해낼 수 있다’는 착각이 건방짐이었음을 인정해야 했다. 새로운 모양의 실패가 나의 뒷 목을 다시 한번 구부러뜨리며 미술 대학에 간다면 꼭 해보고 싶었던 알바, 입시미술학원 선생님이 해보고 싶은 용기마저 싹 다 사라졌다. 덧붙여 아빠의 금전 지원 조건이었던 여대 진학에도 실패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그 당시엔 흔치 않게, 실기 없이 수능 성적만 반영되는 정시 전형으로 생각지도 못한 대학의 예술. 디자인학과에 합격했다. 어중이떠중이 입학금을 받아간 게 첫 오만함이었을까. 죄송하고 송구한 마음을 일절 표현하지 않은 채 칠레레팔레레 대학을 다니기 시작한 게 나의 첫 오만함으로 비쳐졌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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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쓰기에게 치유 당하고 있어요. 제 글이 읽히는 건 부끄럽지만, 어떤 누군가에겐 작은 토닥임으로 느껴지면 좋겠어요. (글쓰기로 생긴 수입은 길 위의 젊은 예술가들에게 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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