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른곰팡이

자식은 부모의 꿈

bygrassrain


귓불 바로 밑길이의 반곱슬 단발머리, 어깨선이 어중간한 교복 블라우스를 여짓껏 입고 어벙하게 서 있다. 여러 번의 압축으로 굴곡이 심한 렌즈를 통해, 둥글고 작은 안경테두리 안으로 화장실 안을 응시하고 있다. 보고 있는 건 손빨래를 하는 엄마의 널따란 등판이다. 내가 없었던 시간 동안의 집 안 공기를 감지하고 있다. 쪼그려 앉으면 엄마의 몸통이 꽉 채워지는 누런빛의 화장실, 그곳에서 풍겨 나오는 공기에 집중한다. 작은 나무 빨래판으로 만드는 일정한 박자에 맞추어 엄마가 흔들거린다. 촐싹맞은 시계추처럼 흔들리지만 신명이 느껴지는 엄마의 뒤통수까지 확인하고 입을 뗀다.

“엄마, 근데... 대학엔 왜 가야 해? 엄마도 안 갔잖아.”

“그때는 고등학교까지만 나와도 됐지만 앞으로 시집 잘 가려면 대학은 나와야지. 그래야 시댁 식구들한테 무시 안 받고 살지.”

‘좋은 대학 입학’이 마치 가훈처럼 세워져 있던 집에서 첫째인 나는 부모의 간절한 뜻을 파악하지 못해 혼란스러웠다. 서울권 사 년제 대학에 가야 하는 이유와 세상이 기대하는 인간의 역할은 바로 연결되지 않았다. 시집을 잘 가는 건 무슨 뜻이며, 결혼을 목표로 대학을 가라고? 난 인간이기 전에 여자라는 점, 여자에게는 ‘시댁’을 비롯한 세상이 절대적 약자로 두고 차별하고 있다는 점, 그것을 확실하게 깨달았다.


“미스 풀비~ 둘둘둘로 한 잔 부탁해~”

아빠는 쉬는 날이면, 식후에 마실 커피를 나에게 주문했다. 가끔 동생이 할 때도 있었지만 대부분 내 이름이 불렸다.

“여자가 평생 사랑받고 살려면 제일 중요한 게 식구들 밥을 맛있게 해야 하는 거야. 이렇게 연습하면 나중에 요리할 때 정확한 양을 맞추게 되지. 그리고 무엇보다 뜨거운 걸 맨 손으로 잘 잡아야 시집을 잘 간다.”

난 마시지도 않는 커피였지만, 중학생이 될 때쯤엔 아주 익숙하게 아빠가 원하는 농도와 양을 맞춰 내놓게 되었다. 그리고 주중엔 아빠 사무실에서 가장 어린 여성 직원이 아빠의 커피 담당자라는 사실도 자연스레 알게 되었다.

그 시대의 한가운데를 지나고 있던 아빠가 첫째 딸에게 강조한 제일 중요한 능력이라곤 오로지 요리뿐이었다. 그리고 아빠가 허락한 나의 인생 목표는 아주 정확하고 집요했다. ‘돈을 많이 벌 수 있는 안정적인 직업을 가진 남자와 결혼하기’ 그러면 자연스레 집안일만 하는 주부로 살아갈 수 있었기에... 중학생이 듣고 싶은 답은 아니었다. 일부러 허무맹랑한 대답을 하는 거라 생각했다. 받아들일 수 없었다. 아니, 전혀 원치 않았다.

특히나 ‘주부’라는 직업, ‘엄마’라는 역할은 절대 하고 싶지 않았다. 제일 가까이에서 보아 온 주부의 모습은 그 누구보다 처참했다. 돈 벌어오는 남편을 하늘의 아들처럼 섬겨야 했고, 하고 싶은 말도 제대로 할 수 없었다. 잘못 내뱉은 단어 하나에 난폭해지는 남편이었음에도 절대복종해야 했으며, 외출마저 자유롭지 못했다. 엄마라는 역할은 자식 때문에 참아야 하는 게 많았고, 남편에게 잘못을 빌어야 하는 일이 많았다. 매일매일이 답답하고 식구들이 하기 싫은 걸 해놔야 하는 역할이 엄마였다. 여자가 온라인 게임 생활을 2년 정도 해보는 건 슬롯 생활하는 남편을 이해하기 위해서 필요하다는 아빠의 말은 아직까지 생생하고 지금까지 충격적이다.

지금 바로 작가의 멤버십 구독자가 되어
멤버십 특별 연재 콘텐츠를 모두 만나 보세요.

brunch membership
grassrain작가님의 멤버십을 시작해 보세요!

글쓰기에게 치유 당하고 있어요. 제 글이 읽히는 건 부끄럽지만, 어떤 누군가에겐 작은 토닥임으로 느껴지면 좋겠어요. (글쓰기로 생긴 수입은 길 위의 젊은 예술가들에게 전합니다.)

89 구독자

오직 멤버십 구독자만 볼 수 있는,
이 작가의 특별 연재 콘텐츠

  • 최근 30일간 3개의 멤버십 콘텐츠 발행
  • 총 55개의 혜택 콘텐츠
최신 발행글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