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화
일요일에는 강현이 오기 전부터 정현이 복도 쪽을 봤다.
앞 침대의 아저씨가 텔레비전을 켰다. 야구선수가 방망이를 휘두르는 사이에 어머니가 물병을 바꿔 놓았다. 정현은 고개를 돌릴 때마다 만화바카라의 같은 칸으로 돌아왔다.
“누구 기다려?”
“아니.”
어머니는 탁자에 떨어진 과자 부스러기를 손으로 모았다.
“강현이는 점심 먹고 온대.”
정현은 바카라장을 넘겼다. 다음 장을 보다가 앞장을 다시 폈다.
강현은 누런 바탕에 작은 곰이 그려진 티셔츠를 입고 왔다. 소매 한쪽이 접혀 있었다. 문을 닫기도 전에 형을 보고 웃었다.
“아직 돼.”
정현은 복도 쪽을 한 번 보고 동생을 손짓해 불렀다.
“가 봤냐?”
강현이 의자를 끌어 왔다.
“어제 남은 거 넣어 봤어. 백 원 됐어.”
“또 매점 갔지.”
“오늘은 다른 아줌마야.”
강현은 바꿔 온 오십 원 두 개를 만화바카라 사이에 놓았다. 정현이 바카라을 기울이자 동전이 그림 속 농구장으로 미끄러졌다.
“야, 거기는 넣는 데 아니거든.”
“알아.”
정현은 손바닥으로 동전을 막았다. 밤새 달라졌거나, 어제 자기가 뭘 잘못 본 것일 수도 있었다. 강현이 웃는 얼굴로 온 뒤에는 그런 생각이 잘 되지 않았다.
“왜 우리한테만 나오냐.”
“오십 원 넣는 사람이 별로 없어서 그런가?”
“백 원 넣으면 이백 원 주나.”
강현이 눈을 크게 떴다. 정현이 동전을 집으며 웃었다.
“그건 하지 마. 아까운 백 원 먹으면 어떡해.”
강현은 정현이 건넨 동전 두 개를 챙겼다. 구슬 넣는 천 주머니에서 또각 소리가 났다.
정현이 이불을 거두자 강현의 시선이 발 쪽으로 갔다. 이불 밖으로 나온 형의 발을 보다가 침대 밑도 내려다봤다. 슬리퍼만 나란히 놓여 있었다.
“형, 나이키 좋아하지?”
“갑자기 나이키는 왜.”
“그냥. 형 신발 망가졌잖아.”
강현은 자기 발끝으로 바닥을 쓸었다.
“요새 형들 많이 신는 거 있잖아. 옆에 크게 그려진 거.”
손가락으로 허공에 표시를 그려 보였다. 정현은 그 손끝을 봤다.
“형한테 사 주면 좋겠다 생각했어.”
“그게 얼만데.”
“몰라. 가서 물어보면 되지.”
정현은 동전 두 개가 든 주머니를 봤다.
“그걸로?”
“계속 나오잖아.”
강현은 주머니를 쥐었다.
“마법인데 신발 한 켤레는 되겠지.”
정현은 안 된다고 하려다가 동생의 손을 봤다. 어제도 오십 원으로는 안 된다고 했었다.
“두 개 하면 네 개고, 그다음은 여덟 개잖아.”
손가락을 폈다가 접었다. 그 뒤는 세지 않고 주머니 끈을 매만졌다.
“내 신발인데 네가 고르냐.”
정현이 물었다.
“형이 고르면 되지.”
“빨간 거.”
“그건 별론데.”
“내가 고르라며.”
강현은 입을 벌렸다가 웃었다. 정현도 웃었다. 어떤 것을 살지 둘 다 가게에 가 본 사람처럼 말했다.
*
이번에는 어머니가 먼저 물었다.
“복도 좀 나갈래?”
정현은 너무 빨리 대답하지 않으려고 만화바카라부터 덮었다.
“응.”
강현이 휠체어를 가지러 갔다. 돌아오는 동안 정현은 침대 가장자리로 조금씩 몸을 옮겼다. 어머니가 오른쪽 다리를 받쳐 주고 나서야 왼발에 힘을 줬다. 어제보다 덜 떨렸지만 의자에 앉자 또 숨이 찼다. 정현은 덮어 둔 만화바카라을 무릎에 올려놓았다.
어머니가 강현의 접힌 소매를 펴 주었다.
“형 다리 부딪히지 않게 천천히 가.”
“어제도 안 부딪혔어.”
“오늘도.”
강현은 알겠다고 대답하고 손잡이를 잡았다. 문을 나서자마자 정현의 어깨 가까이 고개를 숙였다.
“빨간 거 진짜야?”
“아직도 그 생각 하냐.”
“어떤 거 살지 알아야지.”
정현이 웃자 휠체어가 조금 빨라졌다.
“천천히.”
“알았어.”
자판기 앞에는 보호자 둘이 서 있었다. 한 사람이 커피를 뽑고, 다른 사람은 잔돈을 찾아 주머니를 뒤졌다. 정현은 창문 앞에서 멈추라고 했다.
강현도 아무 말 없이 기다렸다.
“저 아저씨도 알까?”
“조용히 해.”
둘은 말을 끊고 유리창에 비친 자판기를 봤다. 커피를 뽑은 사람들이 지나갔다. 강현이 정현의 어깨를 가볍게 쳤다.
“이제 없어.”
동전은 작은 천 주머니에 들어 있었다. 원래 구슬을 넣고 다니던 것이었다. 강현이 끈을 풀고 아까의 동전 두 개를 손바닥에 쏟았다.
“하나는 형이 해.”
강현이 병실에서 챙겨 온 빈 종이컵을 건넸다. 정현은 컵을 왼손에 들고 반환구에서 나온 동전을 담았다. 강현이 새 동전을 꺼내는 동안에는 자신이 레버를 잡았다.
백 원을 다시 바꾸러 갈 때는 정현이 창문 앞에서 기다렸다. 강현이 복도 모퉁이에 나타나기도 전에 주머니 소리가 났다.
몇 번 오가고 나니 컵 바닥에 동전이 겹쳤다. 처음 두 개를 담았을 때와 소리가 달랐다. 정현은 컵을 귀 가까이 기울였다. 강현도 형 쪽으로 귀를 댔다.
“이번엔 바로 나왔네.”
“이게 뭘 어렵다고.”
그러나 다음에는 나오지 않았다. 정현은 컵 속을 한 번 보고 레버를 다시 움직였다. 늦게 떨어진 동전이 반환구 벽을 쳤다.
강현이 낮게 웃었다.
“안 어렵다며.”
정현은 백 원을 집어 동생의 손에 놓았다.
“차나 뽑아.”
“또 율무차?”
“다른 거 먹든가.”
강현은 버튼들을 찬찬히 훑었다. 결국 율무차를 눌렀다.
“그럴 거면 왜 물어봐.”
“그냥 물어본 거지.”
두 사람은 어제와 같은 창문 앞으로 갔다. 강현이 한 모금 마시고 정현에게 컵을 건넸다. 정현이 돌려주자 입을 대던 자리를 찾아 컵을 조금 돌렸다.
“형, 퇴원하면 떡볶이 먹으러 가자.”
“매운 거.”
“난 안 매운 거.”
“따로 먹어야겠네.”
“덜 맵게 해 달라 그러면 되잖아.”
정현은 창틀에 닿은 발받침을 보고 의자를 조금 뒤로 뺐다.
“계단 있잖아, 거기.”
강현은 컵을 든 채 생각했다.
“사 와서 먹어도 되고.”
정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강현도 더 재촉하지 않았다. 창밖에서 병원에 들어오는 차 한 대가 화단 앞을 천천히 돌았다.
돌아갈 때는 강현이 컵에 모아 둔 동전을 주머니에 옮겨 담아 정현의 무릎 위에 놓았다. 바퀴가 줄눈을 지날 때마다 동전 부딪치는 소리가 났다. 정현은 만화바카라으로 주머니를 덮었다.
“찢어지면 안 돼. 성호 거야.”
강현은 바카라 모서리를 손끝으로 펴 주었다. 병실에 들어가자 둘 다 자판기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
월요일 아침, 정현은 일찍 눈을 떴다.
유도부 아이들은 익산으로 출발할 날이었다. 지금쯤 학교에서 차를 기다릴 것 같았다. 도복 가방을 두고 나온 아이가 있는지 코치가 물으면 꼭 한 명이 다시 교실로 뛰어갔다.
정현은 그 아이가 누구일지 생각하다가 그만뒀다.
아침밥을 절반쯤 먹고 숟가락을 놓았다. 어머니가 더 먹으라고 하자 배가 불렀다고 했다. 어제 강현과 나눠 먹을 떡볶이를 생각할 때는 배가 고팠는데, 국 냄새가 오늘은 싫었다.
치료를 받으러 가서도 말을 많이 하지 않았다. 시키는 동작을 하다가 아프면 멈췄다. 치료사가 잠깐 쉬자고 했을 때, 창밖의 나뭇가지 끝을 보고 있었다.
병실로 돌아오니 정후가 병동으로 전화한 뒤였다. 성호가 여덟 권째를 오늘 못 가져온다는 전언이었다. 기영에게서 바카라을 돌려받는 대로 오겠다는 말도 전했다.
정현은 바카라을 쌓은 곳을 봤다. 일곱 권 다음에 아홉 권이 끼워져 있었다.
“알았어.”
어머니는 성호가 못 와서 기운이 빠진 줄 알았는지, 꽃집에 가기 전 만화바카라을 손 닿는 쪽으로 옮겨 주었다.
강현은 학교가 끝난 뒤에 왔다. 바카라가방을 멘 채 입구에서 형의 얼굴부터 봤다.
“오늘은 안 가?”
정현은 바로 알아들었다.
“어디를.”
강현이 눈을 가늘게 떴다.
“알면서.”
정현은 창 쪽으로 몸을 돌렸다.
“오늘은 귀찮아.”
강현은 가방을 내려놓고 숙제 공바카라을 꺼냈다. 고모가 오기 전까지 여기서 하고 간다고 했다. 정현은 동생이 연필 끝을 입에 넣었다 빼는 것을 봤다.
“그거 먹냐?”
강현이 연필을 내려놓았다. 잠깐 지나자 다시 입으로 갔다.
“먹지 말라고.”
“안 먹어. 물고만 있지.”
정현은 피식 웃었다. 강현은 천 주머니에서 오십 원 두 개만 꺼내 손바닥에 펼쳐 보였다.
“아직 남았네.”
“오늘 쓰려고.”
정현은 벽시계를 봤다. 치료를 마친 뒤 겨우 사십 분이 지나 있었다.
“숙제나 해. 고모 오시면 나가고.”
강현이 동전을 공바카라 아래로 밀었다. 그제야 연필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고모가 온 뒤 복도로 나가자 정현이 먼저 자판기 쪽을 가리켰다. 강현이 동전을 꺼내고 정현이 손을 내밀었다.
이번에는 한동안 아무것도 나오지 않았다. 강현의 웃음이 조금씩 걷혔다. 정현은 입술을 다문 채 반환구를 봤다.
“어제 너무 많이 했나.”
강현이 작게 말했다.
정현이 다시 반환 레버에 손을 얹었을 때 안에서 달그락 소리가 났다. 강현이 몸을 숙이는 바람에 두 사람의 팔이 부딪혔다.
“내가 먼저 봤는데.”
“뭘 먼저 봐. 둘 다 보고 있었는데.”
강현은 백 원을 집어 형의 손에 주었다. 정현은 조금 전까지 입을 다물고 있던 것이 우스워져 웃었다. 강현도 따라 웃었다. 정현은 동전을 손안에 쥐고도 반환구를 한 번 더 들여다봤다.
강현은 남은 오십 원도 넣고, 나온 백 원을 매점에서 다시 바꿔 왔다. 두 사람은 몇 차례 더 동전을 바꾸고 나서야 율무차를 뽑았다. 강현이 형의 왼발을 봤다.
“나중에 신으면 되잖아.”
“뭘.”
“그 신발.”
정현은 버튼에서 손을 뗐다.
“안 잊어버렸어.”
두 사람은 창문 앞으로 갔다. 강현은 창틀에 종이컵을 놓고 그 옆에 동전을 늘어놓았다. 차를 뽑고도 돈이 남아 있었다. 동전을 한데 모아 담은 주머니를 형 앞에서 들어 보였다.
“이제 좀 무겁지?”
정현이 받아 보려 하자 강현은 주머니를 도로 당겨 자기 손바닥 위에서 튕겨 보았다.
“야, 줘 봐.”
강현은 웃으며 건넸다. 정현은 무게를 재 보다가 주머니 입구를 벌려 동전들을 한 번 더 봤다.
병실에는 어머니가 먼저 돌아와 물통을 씻고 있었다.
“뭘 그렇게 마셨어? 입에 다 묻었네.”
강현이 손등으로 입을 닦았다. 정현도 같은 곳을 닦으려다 동생과 눈이 마주쳤다. 웃음이 나와 고개를 돌렸다.
“율무차.”
어머니가 수건을 건네주었다. 강현은 수건을 받는 손 뒤로 주머니를 감췄다.
그날 저녁 강현은 집에서 저금통을 비웠다.
병원에서 가져온 동전 주머니는 옆으로 밀어 두었다. 그동안 쓰지 않고 모아 둔 자기 돈을 백 원과 십 원으로 나눠 놓고, 지난 설에 받은 지폐도 꺼냈다. 전부 오십 원으로 바꾸면 몇 개나 될지 공바카라 귀퉁이에 적었다.
그동안은 처음 주운 오십 원에서 나온 돈만 돌려 썼다. 자기 돈까지 넣으면 매번 조금씩 바꾸러 가지 않아도 될 것 같았다. 강현은 나이키라는 글자를 한 번 써 보고 그 아래에 두 줄을 그었다. 얼마인지는 아직 몰랐다.
계산하다가 틀려 지우개로 문질렀다. 동전 하나가 바카라상 아래로 굴렀다.
강현은 엎드려 그것을 주웠다. 다시 바카라상 앞에 앉아 저금통에서 꺼낸 돈과 지난 설에 받은 돈을 나란히 놓았다.
각각 만 원이었다. 강현은 공바카라에 이만 원이라고 적었다. 전부 백 원짜리로 돌아오면 사만 원이었다. 강현은 그 옆에 사만 원도 써 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