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는 형

10화

by마짝꿍텝


그날 오전 수학 시간, 선생이 들어오자 정후가 손을 들었다. 마지막 문제를 다시 설명해 달라고 했다. 선생은 숙제를 걷으라니까 이제 묻느냐면서도 칠판에 식을 썼다.


정현은 두 번째 줄을 보고 자기 종이를 뒤집었다. 부호가 틀렸다. 그 이후부터 모르는 줄 알았는데, 안다고 생각한 부분에서부터 틀렸다.


“여기까지 알겠지?”


칠판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선생이 다음 줄을 쓰는 동안 틀린 식을 지웠다. 너무 세게 지웠는지 종이가 다 일어났다.


걷힌 프린트가 교탁에 쌓였다. 하지만 정현의 종이에는 마지막 문제가 여전히 빈칸으로 되어 있었다.


“너 지난 시간에 배운 거 다 적었어?”


쉬는 시간에 규호가 자기 공바카라을 내밀며 물었다.


“적었…을걸?”


규호가 공바카라을 거두자 정현이 자기 바카라을 펼쳐 보다가 다시 불렀다.


“잠깐만. 두 번째 줄만 좀 볼게.”


정현은 규호의 공바카라을 받아 펼쳤다. 잠깐 고개를 들자 정후의 자리가 비어 있었다.


교실 뒤에서 실내화 밑창이 두 번 바닥을 탕탕 쳤다. 명진이 의자를 밀어 놓고 몸을 돌리고 있었다. 기영은 공바카라에 그린 발 모양 옆에 화살표를 고쳤다.


“여기서 돌면 다음 박자 늦는다니까.”


“안 늦어. 봐.”


명진이 다시 했다. 이번에는 기영도 명진을 보며 타이밍을 맞춰 발을 움직였다. 둘의 실내화가 같은 순간에 멎었다.


명진이 공바카라을 손가락으로 쳤다.


“토요일에 테이프 새로 사자. 네 거 다 늘어졌어.”


“또 내가 사라고?”


“내가 너랑 다니면서 뒤 봐주는데 그 정도는—”


“진방이한테 내가 쳐맞을 때는 어디 있었냐?”


가까이 있던 아이가 웃었다. 명진도 따라 웃었다.


“야, 정후가 나서서 말리는데 나까지 끼면 더 커지지.”


기영은 대꾸하지 않고 공바카라을 덮었다. 명진이 이번에는 자기도 돈을 보태겠다고 하자 그제야 다시 폈다. 춤 동작을 그린 페이지가 나왔다.


정현은 다시 규호의 공바카라으로 눈을 내리고 마지막 줄을 옮겼다. 공바카라을 돌려주려다 두 번째 줄 옆의 작은 화살표를 봤다.


“여긴 왜 이렇게 바뀌는 거야?”


규호가 샤프를 내려놓고 의자를 붙였다.


“옮겨 쓰지 말고 여기부터 잘 봐. 여기서 이걸 이항하면?”


정현은 답하려다 규호의 공바카라을 봤다. 규호가 그 줄을 손으로 가렸다.


“네가 해 봐.”


정현은 자기 공바카라을 가운데에 놓고 첫 줄부터 짚었다.


*


방과 후 신발장에서 정현이 정후를 불렀다. 백 원짜리를 내밀었다.


“전화비.”


정후는 받아 주머니에 넣었다. 정현은 끈을 묶는 척 한쪽 발을 다시 올렸다.


“토요일엔 각자 알아서 훈련하라는데.”


정현이 혼잣말처럼 말했다. 정후가 몸을 폈다.


“어, 그럼 토요일에 시간 비는 거네?”


“왜.”


정후는 신발장 문을 닫았다.


“아니야. 그나저나 나 오늘 성훈이 형 만나는데 너도 갈래?”


정현은 운동화 끈을 세게 당겼다.


“어제 일 때문에?”


“아니, 형이 그냥 얼굴 보자더라. 고향 형인데 좀 만나면 안 돼?”


“그런 뜻 아니야.”


“너도 같이 가든가.”


정현은 어머니가 곧장 꽃집으로 오라고 했다고 말했다. 정후는 알겠다며 먼저 계단을 내려갔다. 정현은 반대쪽으로 가다가 뒤돌아봤다.


“그 누나도 오나?”


정후가 멈췄다.


“으이그… 근데 너네 코치, 니가 나랑 노는 거 별로 안 좋아하는 것 같던데.”


정현은 얼른 대답하지 못했다. 정후는 웃지도 않고 손만 한 번 들어 보인 뒤 교문을 나갔다.


*


성훈은 국제서림 옆 레코드점 앞에 있었다.


조금 떨어진 스쿠터 주위에는 다른 학교 교복을 입은 아이들이 모여 있었다. 한 명이 시동을 걸자 담배를 피우던 아이가 말이 안 들린다며 팔을 쳤다. 레코드점 주인이 문을 열고 연기 들어온다고 하자 아이들은 웃으며 길가로 조금씩 물러났다.


바지통을 힙합바지처럼 늘린 성훈의 덕포공고 교복 바지가 갈색 닥터마틴 구두등을 반쯤 덮었다. 완전히 잠그지 않은 상의 안에는 회색 조끼를 입고 있었다. 손마디가 굵고 목이 두꺼웠다. 어깨는 웬만한 어른보다도 넓었다.


정후는 어릴 때 성훈과 멸치 상자를 같이 옮긴 적이 있었다. 그때도 성훈의 손이 자기 것보다 훨씬 컸다. 이제 정후도 많이 자랐지만 여전히 성훈을 보면 자신이 어린아이처럼 느껴졌다.


정후가 도착했을 때 다른 학교 아이 둘이 성훈 앞에 서 있었다. 하나가 웃으며 말하다가 성훈의 표정을 보고 입을 다물었다.


“그래서 니가 내 이름을 팔았다고?”


“아니 씨발 별것도 아닌 새끼가 존나 깝쳐서…”


“나한테 허락도 안 받고?”


아이의 고개가 내려갔다. 성훈은 다른 한 명까지 봤다.


“가서 그건 네가 한 말이라고 해. 그런데 만약에 우리한테 불만 있으면 나한테 직접 오라 그러고.”


두 아이가 굳었던 얼굴을 그제야 펴고 알겠다고 대답했다. 자리를 뜨면서도 정후를 곁눈질했다. 성훈이 먼저 ‘정후야’ 하고 부르는 것을 듣고서야 길을 건넜다.


지난겨울 성훈이 오거리에서 성인 깡패 셋을 혼자 눕혔다는 말이 정후가 들을 때는 다섯으로 늘어나 있었다.


어느 쪽이든 성훈 앞에서 직접 몇 명이었는지 확인하는 사람은 없었다.


“얼굴이 그게 뭐냐.”


성훈이 물었다. 정후는 교복 앞섶을 벌렸다.


“단추도 두 개 뜯겼어.”


“자랑이다.”


“형 경흥중 졸업했지?”


“어.”


“형 입던 교복 좀 줘.”


“그게 여태 있겠냐? 졸업식 날 불태웠지.”


“와… 우리는 후배들 입으라고 세탁해서 학교에 기증할 건데.”


“하하하. 그래? 대단한 후배 사랑이네.”


성훈은 정후의 부은 얼굴을 봤다. 김영광이라는 이름에는 미간을 잠시 찡그렸다가 이내 고개를 저었다.


“잘 모르겠는데.”


“형이 모르는 놈도 있네.”


“우리 학교라며? 내가 전교생을 어떻게 다 알아. 뭐 걔는 나 알겠지.”


“형 괜히 찾아서 혼내주고 그러지는 마. 내가 해결할게.”


“그럼 네가 해.”


성훈은 정후의 얼굴을 한 번 더 봤다.


“내가 뭐라고 했다는 소리는 하지 말고.”


“형 이름 안 팔아.”


“알면 됐고.”


성훈이 먼저 시선을 거뒀다. 정후는 교복 앞섶에서 손을 뗐다.


길 건너에서 수진이 손을 흔들며 성훈을 불렀다.


남색 교복 마이 안으로 베이지색 카디건의 단추가 보였다. 단발머리 끝이 걸음을 옮길 때마다 턱을 스쳤다. 보조가방이 어깨에서 내려오자 팔꿈치로 받치며 길을 건넜다. 성훈 앞에 와서는 손부터 내밀었다.


“가져왔어?”


성훈이 안주머니에서 테이프를 꺼냈다. 수진은 케이스를 열었다. 노래 제목들을 깨알같이 적어 둔 종이 한쪽이 접혀 있었다.


“다음부터 내가 너 준 거 다른 사람한테 빌려주지 마. 알겠지?”


“좋은 노래 많더라. 글구 금방 돌려받았는데 뭘.”


“내가 내 남자친구 들려주려고 녹음한 거잖아. 내 남자친구의 친구가 아니라!! 이따 갈 때 다시 줄 테니까 이번엔 너만 들어.”


“알았어.”


“무슨 노래가 제일 좋았는지도 말해 주고.”


성훈이 바로 대답하지 않자 수진이 케이스를 자기 쪽으로 당겼다.


“들어 보기는 했어?”


“들었다니까. 뒤쪽은 아직이고.”


“봐. 남 빌려줄 시간에 너나 끝까지 들어.”


수진은 종이를 펴서 다시 테이프 케이스에 잘 넣고 가방에 챙겼다. 성훈이 호탕하게 웃으며 알았다고 하고 보조가방을 받아주려 하자 이번에는 순순히 건넸다. 그러고 나서야 정후를 보고 눈을 조금 크게 떴다.


“정후 너 다쳤네.”


“조금요. 다들 보자마자 그것부터 물어보네?”


“야, 당연하지. 얼굴이 그렇게 부었는데.”


정후가 웃었다. 수진은 웃지 않고 정후의 얼굴을 걱정스럽게 보다가 성훈에게 밥부터 먹자고 했다. 학원 가기 전 시간이 얼마 없다고 했다.


성훈이 정후에게 같이 가자고 턱짓했다. 정후는 두 사람 옆에 붙었다.


“형, 토요일에 노래방 간다며. 나도 가자.”


“너희 엄마한테 또 전화 오게 하지 말고.”


“노래방 가는 걸로 왜 전화가 가.”


“네 친구도 데려와?”


수진이 물었다. 정후가 고개를 끄덕이자 성훈이 웃었다.


“아~ 그 버스에서 민정이랑 껴안았다는 애?”


수진이 정후를 위아래로 보더니 혹시 창가에서 웃음을 참던 애가 너였느냐고 했다.


“어, 그땐 나 못 알아봤네?”


“그때 이 누나가 너까지 볼 정신이 있었겠냐. 민정이 보느라 바빴지. 그럼 민정이도 같이 오면 되… 아니 꼭 와야겠네?”


정후는 웃기만 했다.


“정현이 데려와도 되지?”


“민정이한테는 내가 잘 이야기할게.”


“누나랑 제일 친하다며. 그냥 같이 오면 되잖아.”


“내가 오란다고 걔가 무조건 내 말을 듣는 줄 알아? 여튼 나만 믿어. 다 수가 있으니까.”


수진은 성훈의 팔을 당겨 서울 분식집 쪽으로 돌렸다. 수진이 토요일에 학원이 다섯 시 반에 끝나니 여섯 시에 만나자고 했다. 성훈은 시간을 확인하고 미소와 함께 손가락을 오케이 모양으로 했다.


“나랑 만나니까 좋다는 거야 아니면, 시간이 괜찮다는 거야?”


수진이 성훈을 올려다봤다.


“둘 다.”


수진은 꺄르르 웃으며 보조가방 끈을 성훈의 어깨 위로 올려 주었다.


“배트맨에서요?”


정후가 물었다. 배트맨은 시설은 낡아도 서비스 시간을 잘 줬다. 한가한 낮에 갔다가 계속되는 서비스 시간에 지쳐서 더 이상은 그만 부르고 싶을 때까지 부른 적도 있었다.


“응. 국제서림 맞은편.”


수진이 문을 밀고 들어갔다. 성훈이 뒤따르며 정후에게 너도 같이 먹으라고 했다.


정후도 문을 잡았다. 유리에 비친 교복 단추 하나가 나머지보다 짙었다. 정후가 형이 사는 거냐고 물었고, 성훈은 뭘 당연한 소리를 하냐며 나무랐다. 망설이는 정후에게 성훈이 안에서 또 뭐하냐고 얼른 들어오라고 불렀다.


*


그날 저녁, 정후가 세탁기에서 빨래를 꺼내는데 전화가 왔다. 사촌동생이 성훈 형이라며 수화기를 내밀었다.


“수진이가 민정이도 같이 오기로 했대. 토요일 여섯 시.”


정후는 젖은 손을 바지에 문질렀다.


“네 친구도 오는지 알려 줘.”


“내일 물어보고.”


“네가 데려온다며?”


“응, 걔한테는 아직 말 안 했는데… 형! 걱정하지 마. 근데 어쨌든 올 거야. 거의 백 프로.”


통화를 마치고 수화기를 내려놓으려다 정후는 번호판을 봤다. 지금 전화하면 될 일이었다. 잠시 고민하다가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사촌이 발밑의 빨래 바구니에 자기 빨랫감만 몇 개를 집어넣고 갔다.


정후는 다시 욕실로 들어갔다. 젖은 셔츠를 털어 펴면서 내일 정현에게 할 말을 골랐다.


토요일 여섯 시. 민정 누나도 온다.


그 말이면 정현이 하던 일을 멈추고 자기를 볼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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