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성한 앞머리 붙잡기
끝을 알 수 없는 위기가 일상이 된 퍼머크라이시스(Permacrisis)의 시대, 현대인들은 내일을 기대하지 않는 '냉소'를 지적 성숙이라 착각한다. 부조리한 시스템과 기울어진 운동장을 비판하면서도, 결국 각자도생의 참호 속에 숨어 각자의 밥그릇을 지키는 데 몰두한다. 아무것도 시도하지 않으면 상처받을 일도 없기에, 냉소는 이 가뭄의 시대에 가장 가성비가 좋은 방어 기제다.
그러나 모두가 체념을 합리화할 때, 어떤 사람들은 척박한 강바닥을 걸으며 "내가 바르게 사는 한 반드시 기회가 주어질 것"이라 묵묵히 선언한다. 부귀영화나 세속적인 전리품을 탐해서가 아니다. 기회의 선순환이 보장되는 '생태계'를 조성하겠다는 이상 때문이다. 세속의 잣대로는 이상적이고 무모해 보일지 모르는 이 굳건한 믿음은, 단순한 자기 위로나 맹목적 낙관이 아니다. 이는 철학사에서 가장 치열하게 인간의 가능성을 탐구했던 사상가들이 도달한 가장 현실적인 실천이다.
□ 'Noch-Nicht(아직-아님)'의 존재론
철학자 에른스트 블로흐(Ernst Bloch, 1885-1977)는 그의 필생의 역작 <희망의 원리(Das Prinzip Hoffnung), 1954>에서, 인간의 본질을 과거의 축적물이 아니라 '미래를 향해 열려 있는 가능성'으로 정의했다.
그는 현재의 결핍된 상태를 '아직-아님(Noch-Nicht)'이라는 존재론적 개념으로 설명한다. '아직' 완벽하지 않기에 인간은 끊임없이 결핍을 채우려 하고, 더 나은 세계를 향해 나아간다. 블로흐에게 진정한 희망이란 가만히 앉아 구원을 기다리는 수동적 감정이 아니다. 그것은 현실의 부조리를 직시하고 다가올 미래를 내 손으로 앞당기기 위해 치열하게 투쟁하는 '행동하는 기대(Militant Optimism, 투쟁적 낙관주의)'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상황에서도 두 발로 굳건히 서서 매일 활자를 구워내고 일상을 정돈하는 행위는 바로 이 '행동하는 기대'의 완벽한 표상이다. "바르게 사는 한 기회가 온다"는 믿음은 운명에 대한 종교적 기복이 아니다. 내가 통제할 수 있는 유일한 영역인 '나의 오늘'을 도덕적이고 지적으로 완벽하게 통제함으로써, 아직 오지 않은(Noch-Nicht) 기회의 생태계를 나의 곁으로 멱살을 쥐고 끌어당기는 치열한 실존적 투쟁인 것이다.
□ 크로노스(Chronos)에서 카이로스(Kairos)로
그렇다면 매일 묵묵히 바르게 살아가는 그 반복된 일상은 어떻게 폭발적인 '기회'로 전환되는가? 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고대 그리스인들의 신화적 상상력과 발터 벤야민(Walter Benjamin, 1892-1940)의 시간론을 함께 보아야 한다.
고대 그리스인들은 시간을 두 가지로 나누어 인식했다. 하나는 시계 바늘을 따라 무의미하게 흘러가고 흩어지는 물리적 시간인 '크로노스(Chronos)'다. 신화 속에서 자식을 삼키는 괴물로도 묘사되는 크로노스는, 누구에게나 공평하지만 동시에 모든 것을 늙고 소멸하게 만드는 맹목적이고 냉혹한 시간이다.
반면, 다른 하나는 특별한 의미가 부여되어 운명을 바꾸는 결정적이고 질적인 시간인 '카이로스(Kairos)'다. 고대 그리스 조각가 리시포스(Lysippos)가 남긴 기회의 신 '카이로스' 조각상의 생김새는 그 자체로 완벽한 철학적 은유다. 카이로스는 앞머리가 무성한 반면, 뒷머리는 매끄러운 대머리다. 어깨와 발뒤꿈치에는 날개가 달려 있고, 손에는 저울과 칼을 들고 있다.
나를 발견했을 때 누구나 쉽게 앞머리를 확 움켜쥘 수 있도록, 그러나 한 번 지나가고 나면 날개 달린 발로 순식간에 사라져 절대 뒷머리를 붙잡을 수 없도록 설계된 것이다. 한 번 지나간 기회는 두 번 다시 돌이킬 수 없다는, 즉 "Einmal ist keinmal"이라는 삶의 비가역성이 이 조각상에 고스란히 묻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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벤야민은 그의 생애 마지막 에세이 <역사의 개념에 대하여(Über den Begriff der Geschichte, 1940)>에서 이 신화적 통찰을 철학의 영역으로 끌어올린다. 그는 과거에서 미래로 그저 달력을 넘기며 기계적으로 흘러가는 시간을 '동질적이고 공허한 시간(homogeneous, empty time)'이라 비판했다. 그리고 이 무의미한 연속성을 폭파시키고 도래하는 구원과 혁명의 시간을 '지금의 시간(Jetztzeit)'이라 명명했다.
벤야민에게 진정한 기회(구원)는 동질적이고 공허한 시간표를 따라 예정된 날짜에 배달되지 않는다. 'Jetztzeit'는 어느 문을 통해 들어올지 모르는, 매 순간이 폭발적인 가능성으로 충만하게 채워져 있는 시간이다. 그것은 철저히 흩어지는 일상 속에서, 포기하지 않고 묵묵히 자신만의 원칙을 지켜낸 자에게만 휙 하고 날아온다. 타인의 인정이나 즉각적인 보상이 없음에도 매일 자신과의 약속을 지키며 몰입하는 행위는, 언제 곁을 스쳐 지나갈지 모를 카이로스의 무성한 앞머리를 단숨에 낚아채기 위한 가장 치열한 악력 훈련이다. 무심히 흘러가 버릴 크로노스의 공허한 시간을 내 안에 압축하여 언제든 폭발할 수 있는 '지금의 시간(Jetztzeit)'으로 응축하는 것이다. 임계점까지 그 단단한 시간을 축적하는 이 숭고한 의식(Ritual)은 결국 거대한 기회의 문을 여는 열쇠가 될 것이다.
가벼운 바람에도 휘청이는 삶이 있고,
시대의 가뭄 속에서도 결코 메마르지 않는 삶도 있다.
세상이 묵인하는 부조리 앞에서도 비웃거나 탄식하는 대신,
묵묵히 나의 오늘을 지적으로 정돈하려는 이 '행동하는 기대'는 당장 내일의 결과를 약속하지 않는다.
기회는 아직 오지 않았고, 우리의 내일은 여전히 알 수 없는 텅 빈 여백으로 남아 있다.
하지만 그 불확실한 여백이야말로 인간이 스스로의 실존을 밀어 넣고 닻을 내릴 수 있는 유일한 공간이다.
무의미하게 흩어지는 공허한 크로노스의 시간 속에서,
그저 매일 오늘을 단단히 응축해 나갈 뿐이다.
그렇게 매일매일 쌓아 올린 시간의 여백 속으로, 언젠가 기회라는 섬광이 조용히 스며들 수 있도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