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초의 멈춤
현대 인류는 고도로 세련된 문명 속에 살고 있다고 착각하지만, 우리 뇌의 두개골 안에는 수백만 년 전 사바나 초원을 헤매던 원시 인류의 투박한 '생존 알람'이 그대로 자리 잡고 있다.
뇌 깊숙한 곳에 위치한 편도체(Amygdala)는 맹수를 마주치거나 벼랑 끝에 섰을 때 심장을 뛰게 하고 근육을 수축시키는 원초적인 생존 기제다. 과거의 이 알람은 동물을 마주친 당장의 '그 순간'에만 강렬하게 울렸고, 위협이 사라지면 곧바로 꺼졌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는 사방에서 끊임없이 맹수들을 만난다. 그러다보니 이 시스템은 치명적인 오류를 일으키고 혼란을 주어 정신건강에 해를 주고 있다.
현대 슬롯에서 우리의 생물학적 '목숨'을 노리는 물리적 맹수는 사라졌다. 하지만 편도체는 타인의 시선, 뒤처진다는 공포, 통장 잔고, 알고리즘이 들이미는 타인의 완벽한 삶 등 눈에 보이지 않는 '추상적 위협'들을 맹수와 똑같은 혹은 더 큰 치명적 위기로 오독한다.
19세기 실존주의 덴마크 철학자 쇠렌 키르케고르(Søren Kierkegaard, 1813-1855)는 그의 저서 <불안의 개념(The Concept of Anxiety, 1844)>에서 인간이 겪는 공포를 두 가지로 예리하게 분석했다. 진화생물학이 채 설명하지 못하는 인간 정신의 심연을 정확히 꿰뚫은 통찰이다.
우선 '두려움(Fear/Frygt)'은 내 눈앞에 달려오는 자동차나 칼을 들이민 강도처럼 '명확한 대상'이 존재할 때 느끼는 감정이다. 실체가 있기에 우리는 이성을 작동시켜 '어떻게 피하고 싸울지' 대바카라을 세울 수 있으며, 대상이 사라지면 두려움도 끝난다. 반면 '불안(Anxiety/Angest)'은 무엇 때문에 무서운지 꼬집어 말할 수 없는 상태다. 키르케고르는 이를 "무(無, Nothingness)에 대한 경험"이자 "자유의 현기증"이라 불렀다. 미래에 내가 어떤 존재가 될지 알 수 없다는 불확실성, 텅 빈 진공 상태가 주는 본원적인 현기증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왜 미쳐가는가? 우리 뇌는 본래 명확한 대상이 있는 '두려움'에 반응하도록 설계되어 있다. 그런데 21세기 능력주의 슬롯가 던지는 것은 실체가 없는 '불안'이다. 알람은 계속 울리는데 눈앞에 호랑이는 보이지 않으니 미칠 노릇인 것이다. 이 대상 없는 불안에 빠진 뇌는 패닉을 일으킨다.
그래서 우리는 이 형체 없는 불안을 어떻게든 형체가 있는 것으로 덮어버리려 각자의 방식으로 발버둥 친다. 어떤 사람은 명품을 휘감고 SNS에 과시하고, 또 어떤 사람은 타인에게 나의 헌신을 강요하며 스스로를 기만하는 것이다. 그것이 어떤 모습이든 무게의 중심이 내가 아니라 외부의 무언가, 사람 혹은 물체 등에 가 있다면 한번 물어봐야 한다. 대체 이것에 연연하지 않는 그 시간동안 넌 무엇에 열중하는 것이 두려워서 이런식으로 탈출하려 하는거니.. 만약 내가 지금 맥락없이 무언가를 과시하고 있다면, 그것은 나의 내면을 갉아먹는 그 형체 없는 '불안'을 마주할 용기가 없어 허수아비라도 세워두고 안심하려는 처절한 도피의 몸부림임을 인지해야 한다.
이 끔찍한 대상 없는 불안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 생존본능은 우리에게 가장 기만적이고 슬픈 방어기제를 명령한다. 역설적으로 결핍을 전시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시력이 좋은 사람은 눈 생각을 별로 안하면서 산다. 안경이나 등등의 구조적 도움에 대해서도 상당히 무지하다. 또, 자연스럽게 임신을 하고 출산을 하는 커플들은 난임의 번민이 무엇인지 전혀 알지 못한다. 아울러 태어날때부터 부모님께 사랑받으며 자란 사람들은 입양된 사람들이 겪는 정체성 혼란을 알 수 없다. 비슷하게 어릴때 버려져 고아로 자란 친구들이 슬롯에 나갈때 겪는 자립의 두려움을 알 수 없다. 당연히 알 수가 없다. 이처럼 우리는 진정으로 손쉽게, 온전히 소유한 것에 대해서는 오히려 그 가치에 대해 제대로 인지하지 못할 가능성이 높다. 그리고 그것을 가졌다고 핏대 세워 강조하지 않는다.
역설적으로 우리가 무언가를 소리 높여 강조한다는 것은, 정확히 바로 그 지점이 내 삶에 완벽하게 결핍되었다는 것을 가장 노골적으로 자백하는 행위다. 꽉 찬 실존은 고요히 침묵하지만, 텅 빈 결핍은 살아남기 위해 어떤식으로든 포장하려 한다.
타인의 시선이나 비교라는 거친 자극이 뇌를 때릴 때, 우리는 반사적으로 에고를 방어하려는 반응을 자동 출력한다. 하지만 심리학자 롤로 메이(Rollo May)는 자신의 저서 <잃어버린 자아를 찾아서(Man´s Search for Himself, 1953>에서 인간의 주권이 회복되는 틈새를 정확히 짚어냈다.
"Freedom is the capacity to pause in the face of stimuli from many directions at once and, in this pause, to throw one's weight toward this response rather than that one."
(자유란 사방에서 동시에 쏟아지는 자극들 앞에서 잠시 멈춰 설 수 있는 능력이며, 이 멈춤의 공간 속에서 저 반응이 아닌 '이 반응'을 향해 자신의 온 무게를 실어 던질 수 있는 힘이다.)
마음이 요동치고 감정에 휩쓸릴 때, 그것을 억지로 바꾸려 애쓰거나 즉각적으로 타인에게 쏟아내는 대신 그 감정이 가라앉을 때까지 가만히 지켜보는 '멈춤'의 시간. 이 찰나의 순간이라는 틈새에서 우리가 내리는 결단은 단순히 머리로 가볍게 내리는 선택이 아니다. 사방에서 쏟아지는 불안과, 타인의 시선, 억울함 등 거친 자극들 앞에서 오히려 짐승처럼 반사적으로 튀어나가는 것이 자연스러울 수 있다. 하지만 그 0.1 나노초의 순간에 에고의 멱살을 움켜잡고 ‘워~~워~~’하면서, 자극과 반응 사이에 바리케이드를 치고, 짐승의 기계적 회로를 끊어내는 가장 위대한 실존적 단절이다. 내가 주체적으로 선택한 단 하나의 반응을 향해 내 존재 전체의 무게를 던지는 것이다.
이 고요한 멈춤과 관조의 시간 속에서 우리는 감정의 밑바닥을 들여다볼 수 있게 된다. 내 안에서 요동치던 분노, 억울함, 질투 같은 표면의 감정들을 바둑판을 복기하듯 살펴보자. 차 떼고 포 떼어내면, 그 깊은 바닥에는 단 하나의 진실만이 남는다. 그것이 인간의 생존본능이다.
이 두려움의 실체를 외면하지 않고 끝까지 직시한 자만이, 스스로에게 이렇게 말해줄 수 있다.
"Do not fear. 두려워하지마."
허영과 과시라는 가짜 껍데기를 벗어던지고, 나를 살리려는 내면의 두려움을 스스로 안아주는 통제력. 이상주의자의 뜬구름 잡는 소리처럼 들릴지 모르나, 끊임없이 증명을 강요당하는 이 지독한 시대에서 내 영혼이 붕괴하지 않고 기어이 살아남게 만드는, 가장 현실적이고 강력한 생존 무기다. 결국 생존본능이 주는 메시지는 날 죽이려는게 아니라, 살리려는 것이다. 그 메시지를 제대로 수신하고, 해석해 내는 것이 내 몫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