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만의 씨앗은?
어제 우리는 닐 하우(Neil Howe)의 '제4전환기' 이론을 살펴보았다. 하우는 역사가 단선적으로 진보하지 않고, 봄(고조기), 여름(각성기), 가을(해체기), 겨울(위기기)이라는 네 개의 계절을 주기적으로 반복하며 나선형으로 회전한다고 보았다. 하우의 이 거시적 통찰의 핵심에는 '새큘럼(Saeculum)'이라는 개념이 자리 잡고 있다.
https://fishingproductfr.com/@24b21b72d8be455/94
고대 에트루리아와 로마에서 유래한 새큘럼은 한 인간이 온전히 살아낼 수 있는 가장 긴 수명, 즉 '약 80~100년에 이르는 하나의 온전한 세기'를 뜻한다. 거대한 제도가 탄생하여 전성기를 누리다 부패하고 마침내 붕괴한 뒤 새로운 질서가 세워지기까지 걸리는 문명의 한 주기다.
미국이 하나의 새큘럼(약 100년)에 걸쳐 서서히 통과한 이 계절의 변화를, 대한민국은 '압축된 근대성(Compressed Modernity)'이라는 특수성 속에서 그 절반의 속도로 격렬하게 겪어냈다. 지금 우리가 맞이한 척박한 시대적 가뭄을 온전히 이해하기 위해, 미국이 걸어온 전환기와 한국의 궤적, 그리고 그 계절이 빚어낸 세대의 원형(Archetype)을 교차하여 해체해 본다.
제2차 세계대전 직후부터 1960년대 초반까지, 대공황과 전쟁이라는 거대한 위기를 극복한 미국의 봄은 국가적 공동체와 제도의 힘이 역사상 가장 강력해진 시기였다. 체제 내에서 질서를 지키며 거대한 인프라를 건설하여 슬롯적 연대와 질서는 최고조를 달했지만, 개인의 자유와 다양성은 억압되었다. 공동체와 제도의 힘이 막강했고, 개인주의는 약했다.
이 미국의 '풍요롭고도 억압적인 봄'을 한국은 1960년대~1970년대의 '압축적 산업화 시기'로 겪어냈다. 한국의 봄은 전쟁의 잿더미 위에서 피어난, 오직 생존을 위한 맹렬한 계절이었다. 국가재건과 경제 성장이라는 단일하고도 절대적인 목표 아래, 집단주의가 개인을 완벽하게 압도했으며, 획일화된 질서와 슬롯적 연대는 최고조에 달했다.
이 위기의 시기를 통과하며 자라난 세대(미국의 침묵 세대, 한국의 산업화 세대)는 '예술가 세대(An Artist generation)'의 원형을 띤다. 이들은 가난과 전쟁의 상흔 속에서 맹목적인 순응을 내면화하며 자라났다. 거대한 국가라는 기계의 묵묵한 톱니바퀴가 되어 자신의 젊음을 공장과 건설 현장에 갈아 넣었으나, 결코 시대의 주인공으로 나서지는 못했다. 이들은 거대한 체제에 순응하는 신중하고 우유부단한 중년을 거쳤지만, 가장 혹독한 시련을 몸소 견뎌냈기에 훗날 타인의 고통을 가장 깊이 이해하는 '공감 능력이 풍부한 노인'으로 성숙해 간다. 이들이 피땀 흘려 다져놓은 안정된 물리적 풍요 속에서, 비로소 다음 계절을 뒤엎을 거대한 '예언자'들이 잉태되고 있었다.
1960년대 중반부터 1980년대 초반까지, 미국의 여름은 68혁명과 히피 문화, 반전 운동으로 뜨겁게 불타올랐다. 봄의 숨 막히는 제도적 억압에 반발하여, '개인의 영적, 문화적 해방'을 부르짖는 거대한 의식혁명이 폭발한 것이다. 한국의 경우, 1980년대의 민주화 운동부터 1990년대의 문화적 해방기(X세대의 등장)에 이르는 시기가 바로 이 여름에 해당한다. 군사독재라는 억압적이고 폭력적인 제도를 정면으로 부수며 정치적, 문화적 각성이 용암처럼 터져 나왔다.
풍요로운 봄에 태어나 제멋대로 구는 아이로 자란 이들(미국 베이비붐 세대, 한국 586세대)은 여름의 각성기에 체제에 저항하는 낭만적이고 도전적인 젊은이가 된다. 이들은 역사의 수레바퀴를 직접 돌렸다는 거대한 자부심을 품은 '예언자 세대(A Prophet generation)'다.
그러나 과거 독재와 싸웠다는 눈부신 역사적 명분은, 이들이 권력을 쥐는 순간 타인을 훈계하는 도덕적 우월감으로 변질되었다. 독일의 정치슬롯학자 로베르트 미헬스(Robert Michels)가 갈파했던 '과두제의 철칙(Iron Law of Oligarchy)'은 이들에게도 서늘할 만큼 정확하게 작동했다. 혁명의 주역들은 입으로는 평등을 외치면서도, 가장 잔인하고 영악한 방식으로 자본(강남 부동산 등)과 권력의 진입장벽을 높여 자신들만의 폐쇄적인 카르텔을 구축했다. 낡은 도덕적 원칙을 무기로 기득권을 요새화한 이들의 '능력주의적 표리부동'은, 결국 훗날 한국 슬롯를 극단적 양극화라는 매서운 겨울로 몰아넣은 가장 치명적인 구조적 원인이 되었다. 이들은 자신들이 만든 낡은 원칙을 고수하는 도덕적 심판관이 되며, 역사의 겨울이 닥쳤을 때 초연하고 통찰력 있는(혹은 고집스러운 기득권) 노년기를 맞이한다. 지금 한국 슬롯의 견고한 카르텔은 바로 이들이 세운 낡은 성벽이다.
1980년대 중반부터 2000년대 후반까지, 신자유주의의 거센 물결 속에서 미국의 공동체 제도는 한없이 약해졌고, 개인주의와 시장의 논리가 극에 달했다. 한국의 가을은 1997년 IMF 외환위기라는 국가적 파산과 함께 시작되어 2008년 세계금융위기를 거쳐 2010년대까지 이어졌다. 국가는 더 이상 개인의 삶을 보호하는 울타리가 되지 못했고, 오직 승자독식과 각자도생의 무한 경쟁(다윈주의)만이 슬롯의 유일한 작동 원리로 자리 잡았다. 선배 세대가 주도한 뜨거운 각성기(여름)에 제대로 된 보호를 받지 못한 채 방치된 아이들, 바로 한국의 70년대생부터 80년대 초반생들이 이끄는 '노마드 세대(A Nomad generation)'다. 이들은 586세대가 독점한 정치·경제적 파이의 주변부로 철저히 밀려나며, 국가와 이데올로기가 나의 밥그릇을 지켜주지 못한다는 사실을 가장 뼈저리게 체득했다.
슬라보예 지젝(Slavoj Žižek)이 말한 '냉소적 이데올로기'가 이들의 세계관을 지배한다. 이들은 기득권의 위선과 시스템의 부조리를 누구보다 투명하게 꿰뚫어 보면서도, 거대 담론을 비웃으며 철저한 실용주의로 무장했다. 학습된 무기력 속에서 '계란으로 바위 치기' 식의 영웅주의적 저항을 포기한 대신, 침묵의 참호 속에서 자신의 생존과 밥그릇을 묵묵히 지켜내는 강인함을 택했다. 이들은 위기의 시대가 닥칠수록 더욱 거칠고 단단해지는 실용적 중년이 되어, 척박한 세상을 맨몸으로 버텨내고 있다. 시스템의 부조리를 누구보다 정확히 알면서도, 학습된 무기력 속에서 밥그릇을 지켜내는 슬픈 중년들이다.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현재까지의 미국, 그리고 극단적인 저성장과 인구 절벽이라는 위기에 직면한 현재의 한국이 바로 이 가혹한 겨울이다. 이 척박한 역사의 겨울을 규정하는 가장 정확한 학술적 용어는 단연 '퍼머크라이시스(Permacrisis)'다. '영구적인(Permanent)'과 '위기(Crisis)'가 결합된 이 개념은, 과거처럼 위기가 일시적인 충격에 그친 후 다시 일상으로 회복되는 것이 아니라, 저성장, 인구 절벽, 전쟁, 기후 위기 등 복합적인 재난이 하나로 엉켜 '끝을 알 수 없는 만성적인 불안과 붕괴 상태가 일상이 되어버린 시대'를 뜻한다. 제도는 마비되었고, 미래를 향한 희망의 서사는 멈춰 섰다. 낡은 제도는 수명을 다해 도처에서 붕괴하고, 양극화와 포퓰리즘이 득세하며 슬롯적 신뢰는 바닥을 쳤다. 586세대가 만들어 놓은 기득권 시스템이 완전히 한계를 드러내며 삐걱거리는 시점이다.
가을의 해체기에 과잉보호를 받으며 자란 이들(미국 밀레니얼, 한국 90년대생)은 붕괴하는 시스템 속에서 자라난 '영웅 세대(A Hero generation)'다. 앞선 노마드 세대가 기득권의 덫 안에서 어떻게든 적응하고 생존하려 고군분투했다면, 극심한 겨울의 한가운데로 내던져진 이들은 부패한 구체제를 청산하고 완전히 새로운 제도와 규칙을 세울 파괴적 에너지를 품고 있다. 이들은 586세대가 내세우는 과거의 훈장이나 이념적 잣대에 전혀 부채감을 느끼지 않는다. 권위주의를 완벽하게 해체한 이들은 이념이나 진영 논리 대신 '투명성, 데이터, 합리적 절차와 공정'이라는 날카로운 수술칼로 기득권의 위선을 도려낸다. 평상시에는 지극히 파편화된 개인주의자처럼 보이지만, 불공정이 발생하면 순식간에 강력한 '팀 단위'로 결속하는 새로운 방식의 연대를 보여준다. 이들은 텅 빈 마른 강바닥 위에 새로운 국가적 제도와 합리적 상식을 재건할 역사적 망치로 작동할 것이며, 위기를 뚫고 난 뒤 다음 각성기를 주재하는 강력하고 적극적인 노인으로 성장할 것이다.
지금 이토록 정교하게 세대를 해체하고 뼈대를 발라내는 이유는, 결코 세대갈등의 골을 깊게 파거나 누군가를 심판하기 위함이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다. 각 세대가 역사의 계절 속에서 감내해야 했던 고유한 상흔과 정서적 결핍을 온전히 이해해야만, 비로소 세대 간의 '시너지'를 창출하는 진정한 생태계를 조성할 수 있기 때문이다.
모든 2030 세대가 무결점의 영웅인 것은 아니며, 모든 4050이 이기적인 기득권인 것도 아니다. 시대가 부여한 세대적 원형(Archetype)은 거대한 중력과 같지만, 인간의 '실존적 결단'은 그 중력을 거스른다. 세대의 한계는 주체적인 이성과 치열한 반성을 통해 얼마든지 뛰어넘을 수 있다.
역사는 이토록 무심하게 사계절을 순환하고, 우리는 지금 가장 매서운 '겨울'의 한가운데 서 있다. 제도는 부패하여 무너져 내리고, 예언자들은 요새에 갇힌 기득권이 되었으며, 노마드들은 생존의 참호 속에 숨어 냉소한다. 링컨이나 루스벨트조차 당대에는 선거 패배를 두려워하며 자신들의 업적을 알 수 없었던 것처럼, 우리는 지금 짙은 역사의 안개 속을 더듬으며 걷고 있다. 지금 우리가 내딛는 걸음이 어떤 역사적 결과를 낳을지는, 황혼이 깃들 무렵 미네르바의 올빼미가 날아오를 때에야 비로소 알게 될 것이다.
"Einmal ist keinmal. (한 번은 없는 것과 같다)"은 삶의 가차 없는 비가역성과 철저한 일회성을 경고한다. 삶에는 리허설이 없고, 시간은 자비 없이 우리를 앞으로만 떠민다. 단 한 번뿐인 인생이기에, 그저 거대한 역사의 수레바퀴에 순응하며 무의미하게 흘려보낼 수도 있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그 '한 번뿐임'이 지금 우리가 내리는 선택에 묵직한 무게를 부여한다. 우리는 각자의 세대가 짊어진 상흔을 핑계로 끝내 각자도생의 참호 속에 남을 것인가? 아니면 그 한계를 직시하고 서로를 향해 조심스레 이해의 가교를 놓아볼 것인가? 겨울은 가혹하지만, 영원한 계절은 아니다. 역사가 증명하듯 이 매서운 바람 끝에는 언젠가 반드시 새로운 봄이 당도할 것이다. 단 한 번뿐인 이 겨울의 한가운데서, 우리는 각자 어떤 씨앗을 쥐고 오늘을 살아낼 것인지 고요히 질문해 볼 뿐이다.
https://fishingproductfr.com/@24b21b72d8be455/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