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디세이우스의 죽음 이후

나는 누구인가?

byAltusSolum

지금 생각해보면 가장 꽃 같았지만 당시엔 전혀 꽃인줄 몰랐던 나의 이십대, 나는 이국땅에서 이리저리 치이며 말그대로 공부하는게 너무 힘들었다. 그게 가장 쉬운것인 줄도 모르고.. 아무튼 그때 나는 버거운 일상을 매일 달콤한 상상으로 버텨냈다. '무사히 공부를 마치고 원하는 온라인 게임에 들어가, 우연히 첫사랑을 만났을 때 내 이름 석 자가 번듯하게 박힌 빳빳한 명함을 건네는 장면'. 그 명함 한 장을 건네는 순간, 내 삶의 모든 불안이 끝나고 세상의 인정과 사랑마저 완벽히 내 것이 될 줄 알았다. 왜 이어지는 스토리가 아니라 그냥 장면으로 끝난것인지는 아직도 모르겠지만 아무튼 그 장면을 상상하면서 울며불며 버텨냈었다. 그리고 어느 날 그 눈부신 상상을 고백성사처럼 다니던 성당의 신부님께 털어놓았다. 언제나처럼 웃으며 응원해 주실 줄 알았던 신부님은 가만히 내 이야기를 듣고 계시다가 한말씀만 하셨다.

"인생은 그 명함 다음에 벌어질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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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이 한참 흘러 그때를 다시 떠올려보면 신부님께서 얼마나 내가 걱정스러우셨을까 공감되어 얼굴이 화끈거린다. 나는 첫사랑을 우연히 다시 만난 적도 없을뿐더러, 훗날 명함이 생겼을 때도 굳이 그것을 남에게 주고 싶어 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명함은 나를 구원하는 해피엔딩의 증표가 아니라, 통제 불가능한 '진짜 인생'이라는 무대에 오르기 위한 임시 입장권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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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가혹한 진실을 가장 완벽하게 증명해 내는 텍스트는 다름 아닌 고대 그리스의 대서사시다. '오디세우스의 리더십'에 이어, 오늘은 대서사시의 막을 내리는 충격적인 후일담 <텔레고네이아(Telegoneia)>를 통해 영웅의 허무한 죽음과 껍데기의 종말에 대해 다뤄보려 한다.

John William Waterhouse가 그린 Circe(https://www.dailyartmagazine.com/waterhouse-circe/)


해피엔딩의 기만: 명함을 손에 쥔 찰나의 환상

우리는 흔히 호메로스의 <오디세이아>를 위대한 영웅의 승전기로 기억한다. 트로이 전쟁 10년, 거친 바다에서의 방랑 10년. 무려 20년의 뼈를 깎는 고난 끝에 고향 이타카로 돌아온 오디세우스는 왕국을 거덜 내고 있던 구혼자들을 처단하고 아내 페넬로페를 되찾는다. 마침내 잃어버렸던 '이타카의 위대한 왕'이자 '가부장'이라는 자신의 완벽한 명함(역할)을 되찾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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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리우드 영화나 동화라면 "악당을 물리치고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았습니다"로 끝날 이 웅장한 팡파르는 서사의 끝이 아니다. 인생의 어느 지점에서 빛나는 타이틀을 손에 쥐게 되면 그것이 영원한 성벽이 될 것이라 착각하지만, 고대 그리스인들은 인간의 삶이 그런 명쾌한 결말로 완성되지 않음을 알았다. 완벽한 리더십으로 쟁취한 그 명함 이후에, 진짜 가혹한 인생이 시작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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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웅의 어이없는 죽음: 억압된 카르마의 역습

오디세우스의 영광 이후, 잊혀진 후속작이자 서사시 연작의 마지막 장인 <텔레고네이아>가 기다리고 있다. '멀리서(Tele) 태어난(gonos) 자'라는 뜻의 이 서사시는, 우리가 알던 영웅 신화를 산산조각 낼 만큼 파괴적이고 지독하게 허무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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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 방랑 시절, 오디세우스는 마녀 키르케의 섬에 1년간 머물며 쾌락을 즐기고 서자 '텔레고노스'를 잉태하게 했다. 그는 이를 과거의 그림자로 덮어둔 채, 이타카의 완벽한 왕이라는 '페르소나(가면)' 뒤에 숨을 수 있다고 믿었다. 하지만 우주의 법칙은 가혹하다. 어머니 키르케 밑에서 자란 텔레고노스는 성인이 된 후 아버지를 찾아 나섰다 폭풍우에 휩쓸려 이타카에 표류한다. 굶주림에 가축을 약탈하던 이 이방인 청년을 막기 위해 늙은 왕 오디세우스가 창을 들고 나선다. 두 사람은 서로를 알아보지 못한 채 전투를 벌이고, 오디세우스는 청년이 던진 가오리 독가시 창에 찔려 허무하게 숨을 거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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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년을 투쟁한 위대한 영웅의 최후치고는 너무나도 초라한 죽음이다. 이타카의 왕이라는 화려한 명함도, 평생을 바쳐 쌓아 올린 권위도 그를 구원하지 못했다. 억압해 두었던 과거의 업보(서자)가 돌아와 찌르는 순간, 인간이 목숨 걸고 움켜쥐었던 에고(Ego)는 우스꽝스러울 만큼 쉽게 붕괴해 버리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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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괴한 족보 파괴: '역할'에서 '존재'로

기가 막힌 실존적 결단은 오디세우스의 죽음 그 이후에 벌어진다. 뒤늦게 자신이 아버지를 죽였다는 사실을 안 텔레고노스는 오열하며, 이타카에 남겨진 페넬로페와 텔레마코스를 데리고 어머니 키르케의 섬으로 돌아간다. 그리고 그곳에서 현대의 윤리관으로는 경악을 금치 못할 막장 드라마가 펼쳐진다.

키르케는 마법으로 페넬로페와 텔레마코스를 늙지 않는 불사의 존재(신)로 만든다. 그리고 페넬로페는 자신을 과부로 만든 남편의 서자 '텔레고노스'와 결혼하고, 적자인 '텔레마코스'는 자신의 아버지를 유혹했던 늙은 마녀 '키르케'와 결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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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가장 흥미롭게 생각한 지점은 "도대체 왜 따라간건가? 왜 이타카를 떠났는가?"였다. 상식적으로 적자인 텔레마코스는 아버지의 왕위를 물려받은 후 이복동생을 처단하거나, 반대로 서자가 왕위를 찬탈하는 것이 자연스러운 정치적 수순이다. 하지만 텔레마코스와 페넬로페는 미련 없이 왕국을 버리고 떠났다. 이들이 짐을 싼 데에는 거대한 철학적 은유가 숨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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텔레마코스의 평생 정체성은 오직 '위대한 오디세우스의 아들'이자 '차기 리더'였다. 하지만 아버지가 허무하게 무너지는 것을 목격한 순간 그는 깨달았을 것이다. 만약 이타카에 남아 왕관을 쓴다면, 평생 죽은 아버지의 그림자 속에서 '오디세우스의 대체재(역할)'로만 살아가야 한다는 것을. 그래서 그는 기꺼이 '이타카의 왕'이라는 명함을 쓰레기통에 던져버렸다. 남편의 죽음으로 '누구의 아내, 누구 엄마'라는 가부장제의 굴레에서 벗어난 페넬로페 역시 마찬가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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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물학적 패륜처럼 보이는 이 기괴한 결혼을 타락으로만 볼 것이 아니다. 그것은 타인이 부여한 세속의 껍데기를 완벽하게 파괴함으로써, 시간과 역할의 굴레를 초월한 '불멸의 실존적 주체'로 재탄생하는 위대한 해방의 의식이다. 우리는 지금 신화를 읽고 있으니 한계를 둘 이유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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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것도 아닌 자(Nobody)로 살아남기

우리는 매일 누군가에게 화려한 명함을 내밀며 내가 얼마나 대단한 사람인지 증명하려 발버둥 친다. 하지만 그 명함에 내 영혼을 100% 갈아 넣는 순간, 은퇴 후 명함을 반납하거나 지위가 흔들릴 때 우리는 숨을 쉬지 못하고 붕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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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디세우스는 이타카의 왕이라는 역할에 연연하다 그 껍데기와 함께 파멸했다. 반면 페넬로페와 텔레마코스는 기꺼이 그 무거운 역할을 바닥에 내동댕이쳤기에 새로운 차원의 구원을 얻었다. 진정으로 자기만의 단단한 바닥에 발을 디딘 사람은, 슬롯적 역할을 '언제든 벗어 던질 수 있는 느슨한 외투'처럼 대할 줄 아는 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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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대서사시의 허무한 결말은 절망을 위한 것이 아니라, 거짓된 에고를 버리고 기꺼이 '아무것도 아닌 자(Nobody)'로 살아갈 용기를 내게 만드는 강력한 실존적 백신이다. 이십대의 내가 신부님께 들었던 그 말씀이 수천 년 전 고대 그리스의 서사시 속에서 완벽하게 증명되고 있는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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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자신의 직위와 타이틀, 누군가의 부모 또는 자식이라는 역할을 모두 떼어내고 나면,

지금 나에게는 어떤 '존재'가 남아있는가?

생각해 볼 화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