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7.10.
나는 대한민국에 팽배한 거의 모든 슬롯문제의 근원에는 부동산 문제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만큼 물리적 공간을 소유하지 못했다는 감각은 현대인을 쉽게 무력하게 만든다. 치솟는(이미 과하게 치솟아 있는) 집값과 견고한 제도의 장벽 앞에서 다수는 체념을 학습하며, 내 명의로 된 집이 없음을 곧 '실존의 결핍'으로 치환하게 된다. 설상가상으로 '안정된 온라인 게임'이라는 개념도 사라져가고, '좋은 일자리'는 언감생심, 당장 '소속'된 온라인 게임이 없는 경우 우리는 보통 상대적 박탈감을 느낀다.
결국 인간은 눈앞에 보이는 아파트 평수, 연봉, 명함과 같이 피상적인 자이엔데스(Seiendes, 존재하는 것들)의 목록을 늘리는 데 급급하여, 정작 자신이 이 세계에 고유하게 살아 숨 쉰다는 자인(Sein, 존재 그 자체)의 경이로움을 망각하게 된다. 이 거대한 존재 망각의 시대에, 우리는 어떻게 자기 자신으로 온전히 설 수 있을까? 인간은 세상에 고정되어 놓인 바카라상이나 돌덩이 같은 사물이 아니다. 보통 철학자의 주요개념들이 난해한 한자어 번역을 거치며 그 본 뜻이 흐려지곤 하는데, 그중 하이데거는 유독 그런것 같아 원어의 개념을 직시해보기로 했다.
마틴 하이데거(Martin Heidegger, 1889-1976)의 통찰에 따르면 인간은 특정한 시공간에 던져져, 끊임없이 자신의 존재 의미를 묻고 불안해하며 스스로를 기획하는 유일한 주체, 즉 '다자인(Dasein)'이다.
하이데거 철학의 출발점은 서양 철학 2500년의 역사가 가장 중요한 '존재(Sein)'를 망각해 왔다는 각성이다.
눈앞에 있는 컵, 바카라상, 아파트, 심지어 인간이나 신까지, 형체를 가지고 '있는 것'(자이엔데스, Seiendes)들이다. 그러나 하이데거가 물었던 것은 "이 아파트는 얼마인가?"가 아니라, "내가 이 세상에 온전히 고유하게 '존재한다, 있다'는 것은 대체 무슨 사건인가?" 하는 자인(Sein)의 차원이었다. 존재는 사물이 아니라, 사물이 스스로를 드러내는 그 배경이자 경이로운 차원이다. 바카라상이나 돌덩이는 자신의 상태를 궁금해하거나 불안해하지 않는다. 오직 인간만이 스스로의 의미를 묻고 괴로워한다. 하이데거는 이처럼 특정한 시공간(Da, 거기)에 던져져 살아가는(Sein, 있음) 고유한 인간 주체를 '다자인(Dasein)'이라 명명했다.
우리는 모두 특정한 시대와 조건 속으로 어쩔 수 없이 내던져졌다. 거대한 관료 제도의 부조리를 겪으며 타인의 승인을 기다려야 하는 상황, 물리적인 내 집 하나 없이 임시방편의 공간에 머물러야 하는 조건들은 우리가 스스로 선택한 것이 아니다(스스로 선택한 예외적 경우는 논외로 하자). 이처럼 세계 속으로 속수무바카라 내던져진 수동적 상태를 '게보르펜하이트(Geworfenheit, 던져져 있음)'라 부른다.
그러나 독립적인 사유를 하는 다자인(Dasein)은 던져진 그 자리에 체념한 채 머물지 않는다. 현재의 한계를 딛고, 스스로 기획한 본질을 향해 자신의 삶을 맹렬하게 던지는 '엔트부르프(Entwurf, 스스로를 던져 기획함)'의 능력이 우리에게는 있다. 어느 기관에 속하든, 어느 공간에 던져지든 그것은 임시 무대일 뿐이다. 진정한 주체는 척박한 현실 속에서도 끊임없이 거시적인 정바카라과 철학을 기획하며, 자신이 발 딛고 선 그곳을 가장 밀도 높은 창조의 중심지로 탈바꿈시킨다.
집이 없다는 것은 아직 물리적인 벽돌을 쌓아 올리지 못했다는 뜻이지, 내면의 영토가 없다는 뜻이 아니다. 인간이 세상에 자신의 본질을 굳건히 내리고 온전히 머무는 '보넨(Wohnen, 거주함)'은, 물리적인 건물을 짓는 '바우엔(Bauen, 건축함)'보다 반드시 선행되어야 한다.
물론, 스스로에 대한 철학적 뼈대를 세운다고 해서 현실의 장벽이 주는 공포가 마법처럼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자신만의 '알투스 솔룸(Altus Solum)'을 구축한다는 것은 두려움이 완전히 소거된 온실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뼈저린 두려움과 불안 속에서도 결코 도망치지 않고, 기어이 그 자리에 닻을 내린 채 나의 고유한 실존을 지켜내는 처절한 버팀이야말로 진정한 의미의 '거주함(Wohnen)'이다.
물론 기획력(Entwurf)을 발휘한 삶이 곧바로 세속적 성공이나 물리적 공간의 획득을 보장해주지는 않는다. 치열한 분투의 시간이 길어질 수록 눈에 보이는 결과물이 없다는 사실이 우리를 짓누를 것이다. 그러나 진정한 실존의 가치가 세상이 쥐여주는 결과값과 꼭 같으라는 법은 없다. 결과가 보장되지 않은 척박함 속에서도 존재론적 불안을 직시하며, 매 순간 자신에게 온전히 진실하게 내 삶의 궤적을 그려냈다면 그것으로 이미 충분하다. 훗날 어떠한 형태로든 찬란한 성취가 당도하는 날, 우리는 그 결과물 자체보다 모든 것이 불확실했던 이 고독한 시기를 기어이 살아냈던 나 자신의 단단함을 가장 명예롭게 기억할 것이다.
존경하는 분께서 내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고독은 자신을 향해 걷는 화창함이고,
외로움은 타인을 향해 걸을 때 오는 불편함이다. 자유의 출발은 혼자 있을 수 있는 가에 있다."
어쩔수 없이 세상속에 부대끼며 살아야 하는 우리는 각자의 자리에서 누군가의, 혹은 세상의 '승인'을 기다리며 살아간다. 그 시간은 결코 간단치가 않다. 그러나 어짜피 통과해야 할 이 고독한 시간을 어떻게 대하느냐가 삶의 격을 가른다. 진정한 '사유의 삶'이란 현실을 도피하여 밀실에 숨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세속의 잣대에 나를 끼워 맞추는 조급함을 버리고, 존재(Sein) 망각의 부조리를 응시하며 자신의 역량을 예리하게 벼려내는 제련의 과정이다. 내 삶의 궤적이 영글어가는 과정을 신뢰하며 시간을 온전한 내 편으로 부리는 것이다.
그럼에도 삶은 불확실하고, 살다보면 수도 없이 흔들릴 수 있다. 심지어 치열한 분투 끝에도 끝내 내 몫으로 남은 물리적 영토가 단 한 뼘도 없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진정으로 중요한 것은 최종적으로 주어지는 보상의 크기라기보다 흩어지는 찰나의 점들과 같은 무수한 시간 속 나의 모습이다. 흔들리고 넘어지면서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나 자신을 끝끝내 부정하지 않고 온전히 붙잡을 수 있는가' 하는 질문이다. 불확실성 속에서도 나를 잃지 않고 흔들림 없이 사유하고 묵묵히 스스로를 내던져(Entwurf) 기획해 낸다면, 비록 세상이 내게 단단한 영토를 내어주지 않는다 해도 나는 이미 나 자신에게 당당한 주체로 섰음을 부끄러움 없이 기억하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