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7.28.
우리는 종종 나의 고민이나 불행이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짐이 될까 두려워,
그것을 깊은 침묵 속으로 삼켜낸다.
그것은 타인을 감정의 쓰레기통으로 전락시키지 않으려는 숭고한 인내이자,
스스로의 고통을 자신의 내면에서 온전히 감당해 내겠다는 고차원적인 배려다.
하지만 그토록 애타게 지켜내려 했던 평온의 둑이,
외부에서 밀려온 어처구니없는 감정의 탁류에 의해
허무하게 무너져 내리는 순간을 우리는 목도하곤 한다.
내 삶의 무게조차 버거운 와중에,
타인의 불행이 기어코 내 안전한 세계의 문을 부수고 들어와
사랑하는 이들의 이성을 마비시킬 때 우리는 묻게 된다.
도대체 왜 불행에는 패턴이 있을까?
맹렬한 폭풍이나 허리케인에 '태풍의 눈'이라는 중심이 존재하듯,
반복되는 불행에도 늘 그것을 조장하고 발생시키는 근원적인 지점이 있다.
우리의 삶은 종종 비슷한 고통과 사건,
심지어 비슷한 궤적의 악몽을 반복해서 재생한다.
이를 지그문트 프로이트(Sigmund Freud) 선생님께서는
‘반복 강박(Repetition Compulsion)’이라고 불렀다.
인간은 과거의 상처나 해결되지 않은 억압을 의식적으로 직면하여 풀어내지 못하면,
그와 똑같은 상황을 현재의 삶에서 끊임없이 재현하려는 파괴적인 무의식을 지닌다는 것이다.
즉, 무언가 반복되고 있다는 것은 운명이
우리에게 "아직 네가 여기서 배워야 할 것을 온전히 배우지 못했다"라고 던지는
가장 맹렬한 경고일 수 있다는 뜻이다.
삶이 던지는 이 폭풍우 속에서도,
어떤 사건이나 통찰을 통해 문득 모든 것이 멈춘 듯한 고요한 '각성의 지점'이 찾아온다.
이 지점이 바로 행동의 궤적을 바로잡고 사유해야 할 '태풍의 눈'이다.
존경하는 CG 융 옹께서는 "무의식을 의식화하지 않으면,
무의식이 우리 삶의 방향을 결정하게 되고 우리는 그것을 운명이라 부른다"라고 말씀하셨다.
맹렬하게 반복되는 운명의 패턴 속에서 문득 멈춰 서서
내 행동을 낯설게 바라보는 이 '의식화의 순간'이야말로,
인간이 동물과 구분되는 가장 위대한 지성이다.
보통 안일한 마음일 때는, 태풍의 눈에 들어서면
비바람이 멈췄다며 폭풍이 끝났다고 착각하고 안도한다.
그 고요함이 폭풍의 가장 한가운데라는 참혹한 진실을 망각한 것이다.
아무런 대비도, 행동의 변화도 없이 그저 멈춰 서서 맑은 하늘을 보며 웃고 있다면,
눈이 지나간 직후 반대 방향에서 불어닥치는
더 끔찍한 후반부의 폭풍(눈벽)에 휩쓸려 파멸하고 말 것이다.
반복되는 패턴 속에서 '아차' 하고 깨닫는 각성을 맞이하고도
그것을 삶의 궤도를 수정하는 동력으로 삼지 않는다면,
잠깐의 맑은 하늘을 보며 웃고있는것 만큼이나 치명적으로 어리석은 일이다.
반복되는 폭풍을 빠져나가는 유일한 방법은,
폭풍이 멈춘 그 짧은 시공간 속에서 냉철하게 패턴을 읽어내고
스스로의 궤도를 완전히 틀어버리는 주체적인 결단뿐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왜 이 결단을 내리지 못하고 타인의 폭풍에 휩쓸리는가?
미국의 정신의학자 머레이 보웬(Murray Bowen, 1913-1990)선생님은
<임상현장에서의 가족치료(Family Therapy in Clinical Practice, 1978)>에서
이 지독한 불행의 전염 과정을 ‘삼각관계(Triangulation)’라는 개념으로 설명한다.
보웬의 가족체계이론(Family Systems Theory)에 따르면,
두 사람 사이의 관계는 스트레스와 불안이 높아질 때 필연적으로 불안정해진다.
이때 이 긴장을 스스로 소화할 만한 내면의 그릇을 갖추지 못한 사람은,
무의식적으로 제3자를 끌어들여 삼각관계를 형성한다.
예컨대 자신이 겪고 있는 외부의 갈등으로 인해 감정의 압력이 임계점에 달했을 때,
이를 이성적으로 해결하는 대신
가장 만만한 사람에게 하소연을 하는 것이다.
보통 이런걸 베프나 연인의 덕목이라고 이해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러나 보웬 선생님은 이러한 태도를 비판한다.
이는 문제 해결을 위한 행동이 아니라,
자신의 내면에서 끓어오르는 '불안'이라는 독소를
제3자에게 쏟아부어 심리적 압력을 낮추려는 이기적이고 맹목적인 회피 기제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끔찍한 '불안의 전염(Emotional Contagion)'이 일어난다.
삼각관계에 강제로 끌려들어 간 제3자는 타인의 불안을 자신의 것처럼 흡수하게 되고,
견고해야 할 가족이라는 관계망은 순식간에 하나의 거대한 불안 공동체로 전락한다.
자신의 상처를 묵묵히 견뎌내며 사랑하는 이를 보호하려 했던 숭고한 침묵은,
무바카라임하게 쏟아낸 타인의 고함 소리에 쉽게 묻혀버리고 만다.
특히 (어린)자녀들의 경우 이해할 수 없는 어른들이 조성한 환경속에서 혼란 스러울 수 밖에 없다.
이러한 부조리 앞에서는 누구라도 짙은 환멸을 느낄 수밖에 없다.
보웬은 인간이 이러한 감정적 융합에서 벗어나 독립적인 주체로 서는 과정을
'자아분화(Differentiation of Self)'라고 명명했다.
바카라에서 강조하듯,
자아분화 수준이 높은 사람은 타인의 감정적 소용돌이에 휩쓸리지 않고
이성과 감정을 명확히 분리해 낸다.
우리가 요란한 불행 앞에서 귀를 닫고 단호하게 선을 긋는 것은
결코 이기적이거나 냉혹해서가 아니다.
그것은 무바카라임한 감정 배설과 삼각관계의 폭력으로부터
나의 실존을 지켜내기 위한 가장 정당한 방어다.
타인의 소음이 내 삶을 흔들도록 허락하지 않는 것.
그것이야말로 진정한 보호이자 교양이다.
맹목적인 중력 속에서도 내 영혼이 뿌리 뽑히지 않게 지탱하는 가장 단단한 지성인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교양'이란 학력이나 경제력이 아니다.
자신의 불행과 감정적 동요를 타인에게 함부로 흩뿌리지 않고,
자기 내면의 그릇 안에서 소화해 내는 고차원적인 지성이자 절제력.
자신의 밑바닥을 보이지 않기 위해 입술을 깨물고,
끓어오르는 분노를 논리와 이성으로 식혀내는 묵묵함.
이 우아함이 곧 '타인에 대한 가장 적극적인 배려'이자,
안전하고 예측 가능한 문명 세계를 유지하기 위한 필수 조건이 아닐까?
물론, 인생이란 때로 서로의 최악의 모습을 내보이며 등을 기대고 살아가는 과정이다.
누구나 실수를 하고 폭풍에 흔들린다.
하지만 우리는 그 반복되는 패턴 속에서 반드시 멈춰 서서 반성하고 배워야만 한다.
내게 닥친 혼란을 온전히 내 몫으로 겪어내고 이성적으로 소화해 낸 후에야,
비로소 사랑하는 사람에게 "그때 이런 일이 있었다"며 공유할 수 있는 자격이 생긴다.
진정으로 상대를 애정한다면,
나의 폭풍이 상대의 세계를 침범하지 않도록
기꺼이 홀로 태풍의 눈을 통과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