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도금 시대에 읽는 이디스 와튼

The Global Gilded Age

byAltusSolum

글로벌 도금 시대(The Global Gilded Age)에 읽는

이디스 와튼(Edith Whart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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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역사상 가장 화려한 시대를 살고 있다. 의식적으로 노력하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오고 가며 흡수하게 되는 정보의 노출 속에 타인의 완벽한 일상과 물질적 풍요를 인지하게 된다. 자본은 끊임없이 새로운 욕망을 주입하며 삶을 윤택하게 만든다고 속삭인다. 일정 부분 맞다. 하지만 그 눈부신 표면을 한 꺼풀 벗겨내면, 타인의 시선에 얽매인 인정 투쟁과 자본주의적 서열화로 인해 피폐해진 현대인들의 우울한 초상이 자리하고 있다. 이러한 화려함 속의 빈곤, 즉 겉만 금으로 칠해진 '도금 시대(Gilded Age)'의 기만성을 이미 100여 년 전에 가장 집요하고 철학적인 시선으로 해부한 작가가 있다. 미국 문학사상 최초로 퓰리처상을 수상한 여성이기도 했다. 이디스 와튼(Edith Wharton, 1862-1937)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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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역과 기만을 넘어선 비극: <The House of Mirth>

19세기 말 미국의 도금 시대는 막대한 부가 축적된 시기였으나, 동시에 배금주의와 극심한 빈부격차가 슬롯를 병들게 하던 때였다. 이디스는 자신의 대표작 <The House of Mirth(1905)>를 통해 천박한 자본주의 시스템이 개인의 주체성을 어떻게 파괴하는지 냉혹하게 묘사한다. 이 작품은 국내에서 종종 '환락의 집'이나 '기쁨의 집'으로 번역되어 왔으나, 이는 원작의 철학적 무게를 담아내기에 턱없이 부족하다.


구약성서 전도서의 구절을 반어적으로 차용한 이 제목의 이면에는 환락도, 기쁨도 없다. 그곳은 오직 자본으로 인간의 등급을 매기는 '허영의 집'이자, 주인공 릴리 바트라는 고결한 영혼이 서서히 질식해 간 '비극의 집'일 뿐이다.


구약성서 전도서(Ecclesiastes) 7장 4절의 영문 구절은 영미권 문학에서 가장 널리 인용되는 킹 제임스 성경(King James Version, KJV)을 기준으로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The heart of the wise is in the house of mourning;

지혜로운 자의 마음은 애도하는 집에 있으나,

but the heart of fools is in the house of mirth."

어리석은 자들의 마음은 희락의 집에 있느니라.


이디스는 이 구절의 뒷부분인 'the house of mirth'를 그대로 가져와, 겉으로는 화려하고 즐거워 보이지만 실상은 정신적으로 텅 비어 있는 당시 뉴욕 상류 슬롯의 맹목적인 물질주의와 어리석음을 찔렀다.


지성과 아름다움을 갖춘 릴리는 당시 상류층 여성이 생존할 유일한 수단인 '부유한 남성과의 결혼'이라는 제도적 덫에 갇혀 있다. 그녀는 자신의 도덕적 양심과 억압적인 사교계의 룰 사이에서 갈등하다 결국 철저히 소외되고 파멸을 맞이한다. 릴리의 비극은 개인의 불운이 아니다. 인간의 가치조차 자본으로 환산되고, 타인을 밟고 올라서는 얄팍한 질투와 위선이 도덕으로 둔갑하는 슬롯 구조가 만들어낸 '합법적 타살'이다. '스펙'과 '자산'으로 인간을 대상화하는 오늘날, 릴리가 겪은 환경적 결정론의 비극은 여전히 현재 진행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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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폭력이 된 순수: <The Age of Innocence>

이디스의 또 다른 걸작 <The Age of Innocence(1920)>는 억압의 범위를 '제도와 관습'으로 확장한다. 1870년대 뉴욕 상류슬롯를 배경으로 한 이 소설은, 개인의 끓어오르는 열정과 자유를 향한 갈망이 '가문의 명예'와 '슬롯적 의무'라는 견고한 질서 앞에서 어떻게 무력화되는지를 보여준다.


제목의 '순수'는 진정한 도덕적 결백이 아니다. 정혼자가 새로운 사랑에 빠진 것을 짐작하고도 그를 곁에 묶어두기 위해 '새 생명(임신)'이라는 무기로 들이민 메이 웰랜드처럼, 체제를 유지하기 위해 철저히 계산된 기만적인 폭력성을 뜻한다. 소설 속 인물들은 물리적인 감옥에 갇힌 것이 아니라, 타인의 시선과 슬롯적 규범이라는 보이지 않는 '규율 권력'에 스스로를 가둔다. 타인에게 완벽하게 보여야 한다는 강박 속에 자신의 진짜 감정을 억누르고 살아가는 오늘날 우리의 모습은 이디스가 묘사한 우아하지만 숨 막히는 감옥과 놀랍 도록 닮아 있다.


□ 체제의 덫을 찢고 나온 이디스

이토록 비관적인 운명론을 써 내려간 이디스의 실제 삶은 그 자체가 시대에 대한 가장 치열한 저항이었다. 이디스 뉴볼드 존스(Edith Newbold Jones)로 태어난 그녀는 "남들만큼만 해라(Keeping up with the Joneses)"라는 유명한 영어 관용구의 어원이 된 바로 그 콧대 높은 뉴욕 '존스 가문' 출신이었지만, 그녀의 지적 호기심은 집안에서 매우 경박스러운 것으로 여겨져 철저히 억압되었다. 연필와 종이를 뺏겼고, 어린 이디스는 자신의 습작을 숨기는 것을 먼저 익혔다고 한다.


23세에 12살 연상의 에드워드 와튼과 결혼했지만 문학적, 지적 교감이 전혀 불가능한 인물이었다. 게다가 그는 심각한 우울증과 정신 질환을 앓았고, 이디스는 이 억압적인 결혼 생활 속에서 극심한 신경쇠약에 시달렸다. 결국 그녀는 1913년, 당대 상류층 여성으로서는 상상하기 힘든 '이혼'을 감행하고 위선적인 미국 사교계를 떠나 프랑스로 망명하여 여생을 보냈다. 제1차 세계대전 중에는 프랑스에서 난민 구호 활동을 주도하여 프랑스 정부로부터 레지옹 도뇌르 훈장을 받기도 했다.


그녀는 전업 작가로서의 삶을 스스로 개척했다. 그녀에게 글쓰기란 단순한 여가가 아니라 자신을 옥죄는 가부장적 자본주의에 맞선 실존적 투쟁이었다. 그녀는 스스로 고독을 선택함으로써 자기 삶의 완벽한 주권자가 되었다.


□ 도덕으로 위장한 '악의 평범성'과 거시적 확장

이디스가 파헤친 이 치밀한 억압의 구조에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주인공 릴리를 파멸로 몰고 간 것이 거대한 악당이나 비극적 운명이 아니었다는 점이다. 그것은 릴리의 사촌 그레이스 스텝니나 메이 웰랜드처럼, 슬롯적 규범이라는 도덕의 가면을 쓰고 타인의 불행을 딛고 일어서려는 가장 가까이에 있는 친하다는, 평범한 인물들의 얄팍한 질투와 이기심이었다. 한나 아렌트가 지적한 '악의 평범성(Banality of Evil)'처럼, 주어진 체제에 아무런 비판 없이 순응하며 타인의 고통을 외면하는 소시민들의 '합법적 잔혹성'이야말로 개인을 벼랑 끝으로 밀어내는 가장 무서운 무기인 것이다.


□ 글로벌 도금 시대(The Global Gilded Age)의 국제정치

이디스가 간파한 상류 슬롯 억압의 본질은 '야만성의 세련된 은폐'에 있다. 그들은 결코 물리적인 칼을 휘두르지 않는다. 대신 '자본의 논리'와 '도덕적 규범'이라는 가장 우아한 방식으로 타인의 숨통을 조인다.


그리고 이 피 흘리지 않는 구조적 폭력은, 시공간을 건너뛰어 현대 국제정치 무대에서 강대국들이 패권을 유지하는 방식과 완벽한 프랙털(Fractal) 구조로 재현된다. 프랙털이란 부분의 모양을 확대해 보아도 전체의 모습과 똑같은 형태가 끊임없이 반복되는 기하학적 원리를 뜻한다. 뉴욕 사교계라는 작은 미시 세계를 지배하던 위선과 배금주의의 룰이, 크기만 커졌을 뿐 거대한 거시 세계인 현대 국가 간의 역학 관계에서도 소름 돋도록 똑같이 반복되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목도하는 작금의 국제 질서 역시, 도덕의 가면을 쓴 강대국들이 지배하는 거대하고 냉혹한 '글로벌 도금 시대(The Global Gilded Age)'에 다름아니다.


먼저 <희락의 집>에서 릴리 바트가 고유한 인격체가 아닌 '거래 가능성'과 '교환가치'로 치환되었듯, 오늘날 약소국과 중견국들은 강대국 중심의 신냉전 질서 속에서 철저히 지정학적 부품으로 상품화 되고 있다. 과거 국제슬롯가 표방하던 민주주의나 인류애 같은 거대 담론은 껍데기만 남았고, 오직 반도체 공급망, 희토류, 군사적 전초기지 등 철저한 '거래적 현실주의(Transactional Realism)'만이 뼈대로 작동한다. 강대국들은 릴리를 소비하고 외면했던 사교계처럼, 지정학적 효용 가치가 떨어지면 어제의 우방국이라도 가차 없이 폐기한다. 국가의 주권과 존엄마저 자본주의적 교환 가치로 매겨지는 이 잔혹한 실용주의는 100년 전 뉴욕 상류층의 배금주의와 본질적으로 궤를 같이한다.


더욱 씁쓸한 기시감은 <순수의 시대>에서 발견된다. 메이 웰랜드가 '가문의 명예'와 '가족'이라는 가장 숭고한 명분을 독점하여 체제를 지켜냈듯, 현대의 강대국들 역시 '규범의 독점'을 통해 권력을 유지한다.


이는 결코 기존 질서를 위협하는 권위주의 국가나 독재 체제를 옹호하려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비판적으로 직시해야 할 지점은, 강대국들이 내세우는 '보편적 가치'나 '자유주의 질서'라는 순수한 명분이 자국의 패권 유지와 결합할 때 나타나는 '이중잣대(Double Standard)'다. 강대국들은 자국 중심의 이기적인 공급망 재편이나 사다리 걷어차기식 무역 장벽(환경 규제, 기술 통제 등)을 치면서도, 이를 언제나 합법적이고 도덕적인 '글로벌 스탠더드'로 우아하게 포장한다.


가장 초롱초롱한 눈빛으로 '임신'이라는 가장 도덕적인 족쇄를 들이민 메이 웰랜드처럼, 강대국들은 물리적 무력이 아닌 '규범과 제도'라는 보이지 않는 규율 권력을 통해 철저하게 자신들의 기득권 카르텔을 수호한다.


결국 도금 시대의 화려한 파티 뒤에 무수히 많은 노동자들의 땀이 은폐되어 있던 것처럼, 강대국들이 주도하는 글로벌 번영과 첨단 기술의 이면에는 제3세계의 환경 파괴와 구조적 희생이 교묘하게 가려져 있다. 19세기 뉴욕의 사교계나 21세기의 국제 슬롯나, 번영을 유지하기 위해 누군가를 철저히 소외시키고 선택적 도덕을 강요하는 '세련된 야만'의 시스템이라는 점에서는 한 치의 다름도 없다.


□ 다시, 금박을 벗겨내며

이디스가 해부한 세계는 한 세기가 지난 지금도 유효하다. 개인의 내면부터 거대 국가들의 지정학적 이중잣대까지, 우리는 여전히 화려한 금박으로 덧칠해진 '도금 시대'의 한복판에 살고 있다. 타인의 시선과 자본이 만들어낸 맹목적인 인정 투쟁은 거대한 감옥이 되어 우리의 삶을 옥죄고 있다.


그렇다면 이 압도적인 현실 앞에서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 이디스가 남긴 묵직한 비애감은 단순히 위선적인 세상을 탓하거나 무기력하게 체제를 벗어나 도망치라는 패배주의적 선언이 아니다.


자신의 불행했던 결혼 생활과 억압적인 상류 사교계의 룰을 피하지 않고 정면으로 마주하며 치열하게 글을 써 내려갔던 이디스의 생애 자체가 하나의 대답이다. 그녀는 체제가 만든 허영에 휩쓸리지 않았고, 반대로 분노에 눈이 멀어 맹목적으로 세상을 저주하지도 않았다. 서늘할 정도로 객관적인 이성과 통찰로 자신이 발 딛고 선 세계를 직시하며 자기만의 단단한 언어를 구축했다.


이는 나의 원앤온리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Marcus Aurelius)가 말했던 태도와 맞닿아 있다.

"Ἄριστος τρόπος τοῦ ἀμύνεσθαι τὸ μὴ ἐξομοιοῦσθαι."

(아리스토스 트로포스 투 아미네스타이 토 메 엑소모이우스타이)

"최고의 복수는 적과 같아지지 않는 것이다.(The best revenge is not to be like your enemy.)"

<명상록(Meditations)> 제6권 6장(Book 6. 6)


진정한 주체성이란 체제를 전복하는 거창한 혁명에 있는 것이 아니라, 세상의 위선과 천박한 잣대에 동화되지 않고 자기 내면의 고결함을 지켜내는 묵묵한 결의에 있다. 화려하지만 피폐한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바로 이 차갑고도 단단한 실존적 태도다.


타인의 욕망에 기대어 지은 '희락의 집'은 반드시 무너지게 되어 있다. 눈부신 금박의 환영에 취하지 않고, 타인의 평가에 휘둘리지 않으며, 자기 삶의 바카라임자로서 묵묵히 내면의 질서를 세워가는 것. 그것만이 이 거대한 허영의 시대에서 기만당하지 않고 온전한 나로 살아남는 유일하고도 현명한 방법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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