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 아름다운 착각을 넘어, 사랑하는 능력으로

말라비틀어진 '북어'가 아닌, 기쁨의 공동체로

by몸글 작가 고결

3부 바닥에서 피어난 끈끈한 가족의 초월적 연대



고된 택배 현장에서 살갑게 함께 하던 부부가 어느 날 갑자기 갈라서는 비극적인 풍경을 종종 목격하곤 한다.


2인 1조로 다정하게 일하던 그들이 대체 어떤 짙은 갈등을 겪었기에 저토록 차갑게 돌아서 버린 걸까.


끝내 헤어지고도 아무 일 없었다는 듯 홀로 묵묵히 레일 곁을 지키는 뒷모습, 그리고 그 파국을 알면서도 지독하리만치 태연하게 대하는 주변 사람들의 반응은 내게 서늘한 충격 그 자체였다


그들은 처음엔 서로의 짐을 나누어지겠다며 서로를 돕는 마음으로 이곳에 왔겠지만, 서로가 한계에 달하는 순간 사랑의 관계가 너무나도 쉽게 찢겨 나갔다는 사실에 가슴이 아팠다.


그 서글픈 파국을 볼 때면, 내 안에 웅크린 오만한 사랑의 실체가 서늘하게 겹쳐서 보인다.


그것은 가족을 향한 사랑이라고 고상하게 포장은 했지만, 실상은 가족을 위하기보다는, 나의 노고에 대한 가족의 인정과 존중을 바라는 대가성 욕구가 더 강했던 것 같다.


그것은 이기적인 보상심리이자 통제 욕구였다.


내 뜻대로 통제되지 않을 때 쏟아내던 날 선 감정들은 저 레일 곁에서 파탄난 커플들의 그것과 다를 바 없었다.


고대 그리스인들은 인간이란 자신의 고유한 잠재력을 꽃피울 때 비로소 순수한 행복인 '유다이모니아(eudaimonia)'에 도달한다고 믿었듯,


아내와 아들 역시 누군가의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저마다의 행복을 찾아가기 위해 존재하는 독립된 주체들이다.


이 사실을 모른 채, 그저 가장인 나의 성공과 행복이 곧 가족의 행복이라고 뭉텅 그려 생각하고, 그것을 가족을 향한 사랑이라고 너무 오랜 시간 착각하며 무지하게 살아왔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 나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파국으로 치닫는 저들처럼 무너지지 않고 우리가 어떻게 이 비좁은 탑차 안에서 서로를 독립된 존재로 인정하며 함께 웃을 수 있게 되었는가 하는 점이다.


이제 그것에 관해 이야기하고 싶다.


택배의 세상으로 들어서면서 생계가 나 혼자가 아닌 '가족 공동의 노동'이 되어버리자, 그동안 내가 쥐고 있던 가장의 통제권은 속절없이 허물어졌다.


가부장적 권위와 수직적 질서에 익숙했던 내게 그것은 처음엔 받아들이기 힘들 정도로 당혹스러웠다.


그런 가치관의 혼란 한복판에서 최승호 시인의 시 <북어>가 가슴을 파고들었다.


시인은 골목 가게에 매달린 말라비틀어진 북어를 통해 고정된 틀에 구속된 삶을 신랄하게 일깨운다.


"가슴에 싱싱한 지느러미를 달고 헤엄쳐 갈 데 없는 사람들이 불쌍하다고 하는 순간,

느닷없이 북어들이 커다란 입을 벌리고.

거봐, 너도 북어지. 귀가 먹먹하도록 부르짖고 있었다."


인생이란 가슴에 달린 싱싱한 지느러미로 각자가 헤엄쳐 갈 바다를 찾아가야 하는 자유와 그것을 누릴 숙명을 지녔다.


그렇지 못하고 ‘가장’, ‘아내’, ‘자식’이라는 고정된 배역에만 예속되어 서로를 통제하고 기대려 할 때,


우리 역시 생명력을 잃고 뻣뻣하게 굳어버린 북어 신세를 면치 못한다는 서늘한 의미로 다가왔다.


우리가 택배센터에서 목격했던 비극적인 커플들 역시, 서로에게 자신만을 위한 고정된 역할을 서로에게 강요하다 결국은 안타까운 파국을 맞이한 것은 아닐까.


척박한 택배 현장은 역설적이게도 내 머릿속 가족을 향한 굳건했던 위계질서를 순식간에 해체시켜 버렸다.


견고한 수직적 위계 대신, 이곳에서는 오직 상황에 따라 '주관하는 자'와 '돕는 자'라는 수평적이고 유연한 역할 교대만이 빈번하게 일어났다.


세심하고 꼼꼼한 아내가 택배상자를 분류하고 배송할 주소를 체크하면, 나는 철저히 말단 조수가 되어 상자를 나르고 적재한 후, 그녀의 안전하다는 지시에 따라 운전대를 잡는다.


아들이 자신의 차량에 자신만의 동선계획과 방식으로 물건을 적재할 때면, 나는 아버지가 아닌 돕는 ‘조수’의 역할에만 충실할 뿐이다.


아들이 빠르고 편하게 짐을 쌓고 나가도록 부지런히 손발을 놀릴 뿐, 나의 경험이나 조언을 들려줄 필요가 없었다.


그저 아들이 스스로 깨닫고 터득할 때까지 곁에서 지켜보며 기다려 주는 것이 오히려 여러모로 아들을 위하는 것임을 시행착오 끝에 깨달았기 때문이다.


자신의 몸에 붙은 지느러미로 마음껏 흔들며 원하는 방향으로 자유로이 움직이는 것, 그것이 알량한 나의 조언보다 아들을 더 행복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수많은 짐들을 가장 빠르고 신속하게 배송하기 위해서는 가족이 한 몸처럼 유기적으로 움직여야 했다.


가족 누군가가 먼저 배송을 할 때면 누군가는 신속한 배송지원을 위해 탑차 내의 짐을 배송 순서대로 정리하거나, 빠진 상품이 없나 체크하며 보조해야 했다.


나는 익숙했던 가족의 앞자리에서 물러나 가족의 뒤에서 묵묵히 몸을 움직여 돕는 자의 역할에 충실하는 법을 새롭게 배워야만 했다.


일을 마친 후, 집으로 돌아와서도 식사준비, 식사 후 뒷정리, 빨래, 청소 등 자질구레한 집안 일도 이제는 모두의 공동 일거리가 되었다.


늘 주관자이자 통제자였던 내가 기꺼이 지시를 받는 조력자로 변신하면서, 굳어 있던 우리 가족의 일상에 점차 유연한 생기가 돌기 시작했다.


가족들은 자신들을 보호하고 지켜주는 힘 있는 가장을, 남편을, 아버지를 원한게 아니었다.


아내와 아들은 자신의 몸에 붙은 지느러미를 휘저으며 원하는 곳을 향해 마음껏 나아가길 원하고 있었다.


그런 바람을 말없이 돕는 가장이자, 남편, 아버지를 가족은 원하고 있었다.


사랑이란 상대를 깊이 이해하고 끝까지 받아들이려는 숭고한 의지다.


하나가 다른 하나를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의 고통을 나누어 짊어지며 주고받는 양방향의 공감이었다.


이러한 관계의 재배치, 또는 자율적 역할극(Role-playing)은 우리 가족의 분위기를 완전히 바꾸어 놓았다.


누군가 한 명이 일방적으로 통제하는 관계는 필연적으로 우울과 억압을 낳지만, 서로의 역할을 기꺼이 내어주고 바꾸는 관계는 편안하고 거리낌 없이 자유롭다.


좁은 탑차 안에서 부대끼고 땀 흘리는 동안, 우리는 상대방이 무엇을 힘들어하고 어떤 순간에 숨이 차오르는지 본능적으로 살피게 되었다.


그 긍정적인 눈치는 권위에 짓눌린 두려움이 아니라, 나를 깊이 배려하고 있다는 따뜻한 감각이자 함께 헤엄치고 있다는 끈끈한 가족애로 다가왔다.


비록 땀 냄새로 찌든 힘겨운 택배 현장이지만, 가부장적인 권위를 떼어내고 자유로운 관계를 향한 치열한 혁명이 일어나는 순간부터,


이곳은 결코 힘겨운 실패와 좌절의 공간이 아니라, 일상의 변화를 경험하는 경이로운 성소(聖所)로 변하는 느낌이다.


에리히 프롬은 그의 저서 《사랑의 기술》에서 참된 사랑이란 단순히 끌리는 수동적 감정이 아니라, 자신의 이기적 통제 욕구를 단념하고 상대를 있는 그대로 수용하는 능동적이고 주체적인 '능력'이라고 짚어냈다.


결국 사랑이란 어떤 대상을 선택하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내 속에 기꺼이 사랑할 수 있는 능력이 있느냐의 문제다.


사랑받기보다는 내 안의 사랑하는 역량을 묵묵히 키워 나가는 것.


그것은 힘겨운 택배 레일 곁에서 우리 가족이 함께 서로를 지키며 버티게 한 삶의 원동력이자, 진정한 사랑의 의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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