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관문 안쪽에 펼쳐지는 새로운 세상
종일 수백 개의 택배를 배송하고 마친 후, 지친 발걸음을 이끌고 엘리베이터에서 내려 도어록 번호판에 조심스레 손가락을 얹는다.
'삐리릭' 하는 경쾌한 전자음과 함께 묵직한 현관문이 열리는 찰나, 가슴 깊숙한 곳으로 밀려드는 따스한 온기와 익숙한 냄새,
그리고 이루 말할 수 없는 편안함이 우리를 맞아준다.
집으로 들어서기 전 마주하는 이 현관문은 단순한 철문이 아니다.
그것은 세상의 거친 풍랑과 매서운 자본의 논리가 폭력적으로 난무하는 바깥세상으로부터 나를 완벽히 격리시켜 주는 방패이자, 나만의 천국 같은 세상이 열리는 가장 선명한 경계선이다.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우리는 2년마다 돌아오는 전세 만기일을 두려워하며, 치솟는 전세금 증액을 걱정하고 이삿짐센터 번호를 뒤적이는 고단한 삶을 살았다.
택배 일을 하며 육체적 고통이 뼈에 사무칠수록 몸을 온전히 누일 굳건한 안식처가 절실해진 우리는,
그 서러운 유랑의 삶에서 벗어나기 위해 오랜 고민 끝에 대출의 힘을 빌려 집을 사기로 결정했다.
힘겹게 대출 승인 통지 문자를 받고 기뻐했던 것도 잠시, 억 단위의 대출금이라는 숫자가 우리의 심장을 아득하게 짓눌렀다.
처음 이곳을 찾아왔을 때만 해도 마음이 그리 편치 않았다. 주변에 흔한 상가도 하나 없고, 음식 배달조차 제대로 되지 않는 외딴 아파트 단지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단지 안으로 조심스레 발을 내딛는 순간, 우리는 거짓말처럼 마음을 빼앗기고 말았다.
봄날의 연분홍 벚꽃이 바람에 흐드러지게 흩날리고, 넓은 중앙 정원 위로 아이들이 해맑은 웃음소리를 내며 마음껏 뛰어다니던 그 풍경은 마치 영화 속 '동막골'처럼 소박하고 따스했다.
화려함과 편리함이라는 가치에 눈이 어두워 방황하던 우리가 비로소 '사람이 거주하는 삶의 터전'이 무엇인지 알아보게 된 기적 같은 순간이었다.
택배를 시작하면서 나는 살아온 세상 속 모든 복잡한 인연을 정리한 채, 수도권의 가장 변두리인 이곳까지 정처 없이 흘러왔다.
지하철 출근 중에 피곤에 지쳐 졸다가 우연히 내렸던 낯설고 한적한 전철역에서, 마음 한구석으로 한없이 내려앉던 진한 편안함이 마냥 좋았다.
"모든 것이 사람, 오직 사람뿐이다. 사람이 모든 것을 움직이고 지배하는 듯하며, 신은 잊히고 인간이 모든 것을 다스리는" 그 숨 막히는 세상 속에서 그동안 참 많이 지쳐버렸나 보다.
그저 자유로운 공기 속에서 남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고 편안함을 누리고 싶었던 영혼의 갈증을 좇아,
고요하고 외로운 이곳에 들어와 생활한 지도 어느덧 5년이 훌쩍 지나가 버렸다.
고독은 참 달콤하리라는 속삭임 뒤에는 어쩌면 '완전한 자유', 바꿔 말해 내 마음대로 생각하고 느끼고 행동하기 위해 타인들에게서 멀리 떨어지고픈 강렬한 욕망이 숨어 있었을 것이다.
"여러 소란스러운 만남에서 흩날리거나 다친 깃을 다시 펼칠 수 있는" 고요를 상상하며 기꺼이 내가 알던 소란스러운 세상을 탈출한 것이다.
배송을 마치고 남들이 화려한 불빛과 편리함이 넘치는 도심으로 돌아가기 위해 꽉 막힌 도로 위에서 아등바등할 때,
나와 아내는 반대편의 한적해진 도로를 따라 유유히 이 고요한 둥지로 향한다.
조금은 외롭고 불편할지라도, 온전히 고요한 이 공간의 매력에 우리는 점차 깊이 빠져들었다.
사람들과 멀어진 이곳에서야 비로소 나는 아내와 아들, 내 가족들이 가진 진짜 욕구를 깊이 들여다보고 이해할 여유로움을 되찾았다.
과거에는 휴일이 되어도 마치 밀린 가장의 역할을 수행하는 또 다른 의무처럼 느껴졌던 시간들이, 고단한 육체노동을 시작한 후로는 각별한 치유의 시간으로 변했다.
근사한 음식이나 특별한 외식 장소가 아니어도, 택배를 마친 후 가족과 한데 모여 요리를 하고 오늘 겪은 배송 에피소드를 나누며 웃는 식탁의 온기는 더없이 포근하다.
대출금이나 시세차익을 의미하는 차가운 숫자의 위협은 그 따스한 밥상머리에서 하얗게 힘을 잃고 녹아내렸다.
스피노자는 자기 존재를 보존하고 삶을 맹렬히 지속하려는 생명의 에너지를 '코나투스(Conatus)'라 불렀다.
휴일 아침 창가에 쏟아지는 햇살과 푸른 숲을 보며 늦은 커피를 마실 때 온몸으로 흘러드는 전율 같은 평온함, 그것은 바로 생을 지속하게 하는 나의 코나투스였다.
고단한 배송을 마치고 들어선 어느 겨울밤, 짐을 내려놓고 창밖을 내다보았다.
새하얀 설국을 담은 그림 같은 풍경 속으로, 어린 고라니 한 마리가 먹을 것을 찾아 위태로운 눈길을 서성이고 있었다.
창가에 나란히 선 아내의 입에서 짧은 탄성과 함께 깊은 측은함이 새어 나왔다.
집이라는 안과 밖, 그 단호한 경계에서 우리의 시선은 완전히 달라진다.
현관문 밖, 차가운 눈보라가 치는 세상 한가운데서 나 역시 저 굶주린 고라니처럼 무거운 짐을 메고 위태롭게 생존을 구걸하는 짐승에 불과할지 모른다.
하지만 이 견고하고 따뜻한 이 공간 안으로 발을 들이는 순간, 나는 비로소 타자의 고통을 연민 어린 시선으로 품어낼 수 있는 '인간으로서의 여유와 존엄'을 기적처럼 회복한다.
안과 밖을 가르는 이 경계가 없었다면, 우리는 매일 밤 무너져 내리는 서로의 '선량한 의지(코나투스)'를 결코 다시 세우지 못했을 것이다.
남미의 '파라카스' 해변은 수만 킬로미터를 날아온 철새들이 마지막으로 닿는 세상의 끝이다.
로맹가리의 소설 속 철새들은 이곳을 천국 같은 안식처라 믿고 거센 바람을 뚫고 필사적으로 날아오지만,
힘이 다한 새들은 결국 쉴 곳을 찾지 못하고 모래 해변 위로 연이어 바스러지듯 추락하고 만다.
우리 역시 마찬가지였다. 저마다 마음속에 '성공'이라는 이름의 파라카스 해변을 품고 살아왔다.
그곳에 닿기만 하면 영원한 안식이 주어질 거라 믿으며 쉼 없이 날갯짓을 해왔다.
하지만 그토록 갈망하던 세상의 끝에 도착했을 때, 우리를 기다리고 있던 것은 따뜻한 구원이 아니었다.
그것은 모든 희망과 기도를 허망하게 집어삼키는 깊고도 기나긴 침묵의 바다였고, 자본주의가 만들어낸 뱃사람들의 악몽인 '아홉 번째 파도'처럼 모든 것을 부수는 거대한 파도였다.
내 인생 속에서 성공의 이정표라 믿었던 그 환상은 허망하게 사라졌다.
하지만 수수료 몇백 원짜리 짐을 나르는 세상의 가장 낮은 곳으로 흘러 왔지만, 나는 비로소 수십 년을 돌고 돌아 나의 영혼을 누일 진짜 오아시스를 발견할 수 있었다.
자산(House)이 영혼의 안식처(Home)로 바뀌는 이 경이로운 기적.
그것이 내가 매일 밤 통증이 지배하는 몸을 이끌고 묵묵히 이 현관문을 열고 돌아오는 유일하고도 명백한 이유다.
집은 우리의 출발지이자 최종 종착지였다.
힘겨운 택배노동을 하면서 우리는 '집(공간)'이 지닌 쉼과 치유의 힘을 깨달은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