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역은 선릉ㅡ선릉역입니다.
스마트폰 화면 위의 [Y] 버튼을 누른 순간, 세상의 소음이 거짓말처럼 고요해졌다.
에어팟 속에서 흘러나오던 경쾌한 인디 음악이 뚝 끊기더니,
귀를 찢을 듯한 기계음과 함께 안내 음성이 머릿속을 후벼 팠다.
[대상 지정 완료.]
[온라인 게임인 (32세, 기획팀 과장 '강진우')의 하루가 로딩됩니다.]
[싱크로율 100%. 단, 체험 중 실제 시간은 정지됩니다.]
[원래 몸으로의 귀환은 오늘의 모든 일정이 종료된 후 가능합니다.]
"잠깐, 뭐야 이거…!"
소희가 입을 달싹여 보려 했지만, 목소리가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속으로 소리를 지르는 사이, 눈앞의 풍경이 순식간에 일그러졌다.
2호선 신도림역의 시끄러운 환승 통로와 사람들 무리가 물감처럼 번지더니, 현기증과 함께 의식이 아득하게 빨려 들어갔다.
낯선 시야, 묵직한 무게
"… 과장님? 강진우 과장님?"
뺨을 때리는 듯한 서늘한 공기에 눈이 번쩍 떠졌다.
소희는 본능적으로 손을 들어 눈을 비비려 했다.
그런데 이상했다. 손이 훨씬 컸다. 마디마디 굳은살이 박여 있고, 손등엔 굵은 핏줄이 돋아 있는 단단한 남자손이었다.
"응?"
소희가 입을 열자, 앳됐던 스물둘의 목소리가 아니라 굵고 낮고, 잠긴 남자의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기겁하며 고개를 숙였다. 코트 자락이 보였다.
대학생인 자기가 입던 얇은 점퍼가 아니라,
드라이클리닝을 맡긴 지 오래된 듯 깃이 뻣뻣한 남색 롱코트였다.
손에는 가죽이 해진 서류 가방이 들려 있었다.
내가… 그 남자가 된 거야? 진짜로?!
정신을 차리려 머리를 흔들자, 지끈거리는 두통이 뇌를 짓눌렀다.
어제 잠을 제대로 자지 못한 사람 특유의 묵직한 통증이 고스란히 전해져 왔다.
"과장님, 정신 차리세요. 선릉역 다 왔어요. 늦으면 안돼요 …
자료는 다 준비되신 거죠?"
옆에서 서류철을 품에 안은 채 안절부절못하는 젊은 여자 직원이 눈에 들어왔다. 명찰에 적힌 이름은 '유진아 대리'.
아마도 같은 부서 동료인 듯했다.
어떡해, 어떡해! 나 대학생인데! 보고서가 뭔지도 모르는데!
하지만 머릿속 깊은 곳,
강진우라는 남자의 몸에 새겨진 '출근 5년 차 과장'의 근육 기억이 저절로 입을 열었다.
"아… 네, 유 대리. 자료는 아까 열차 안에서 최종 검토 끝냈어요. 걱정 말고 회의실로 바로 올라갑시다."
목소리는 의외로 차분하고 프로페셔널하게 나왔다.
유진아 대리가 그제야 안심했다는 듯 숨을 내쉬었다.
"다행이네요. 이사님 오늘 기분 안 좋아 보이시던데… 무사히 넘어가야 할 텐데요."
소희는 속으로 침을 꿀꺽 삼켰다.
선릉역 근처의 거대한 오피스 빌딩.
로비의 스피드게이트를 지나 엘리베이터를 타고 14층에 내리는 순간, 소희의 입이 떡 벌어졌다.
[현재 스트레스 지수: 85%]
[주의: 오전 회의까지 남은 시간 25분]
시각화된 상태창이 시야 구석에 은은하게 깜빡였다.
주변을 둘러보니 모든 사람들이 모니터 앞에 목을 빼고 앉아 키보드를 두들기고 있었다.
타자 소리가 마치 기관총 난사처럼 사무실을 가득 채웠다.
소희는 강진우의 기억을 더듬어 자신의 자리로 찾아갔다.
바카라상 위에는 포스트잇이 사방으로 붙어 있었고, 뜯지도 않은 숙취해소제와 반쯤 남은 아메리카노 캔이 놓여 있었다.
모니터를 켜자마자 업무 메신저와 이메일 알림이 폭탄처럼 쏟아졌다.
ㅡ [참조] 3분기 마케팅 예산안 재검토 요청.
ㅡ [기획팀] 진우 씨, 기획안 오타 확인 좀.
ㅡ [팀장] 진우야, 들어오면 바로 내 자리로 와.
"와…."
소희는 숨이 턱 막혔다.
어제까지만 해도 강의실에 앉아 어른들의 멋진 슬롯생활을 동경하며 아이스 라테를 마시던 자신이었다.
근데 막상 들어와 보니 멋진 오피스 드라마가 아니었다.
끊임없이 밀려오는 업무 알림, 언제 터질지 모르는 긴장감.
그냥 아침을 버텨내는 소리 없는 전쟁터였다.
"강 과장 잠시만."
기획팀 팀장의 부름에 소희는 벌떡 일어났다. 다리가 후덜거렸다.
회의실에 들어서자마자 공기가 달랐다.
냉방이 지나치게 세서 싸늘할 정도인데, 그것과 별개로 분위기 자체가 냉랭했다.
이사라는 사람은 A4 용지 한 장을 테이블 위에 탁 내려놓았다.
3분기 마케팅 기획안이었다.
"강 과장, 이게 맞는 방향이에요? 나는 솔직히 잘 모르겠거든 이사님이 뭐라고 하실지… 일단 들어가 보자고."
[스트레스 지수: 91%]
강진우의 몸이 반응하려 했다.
굽히고, 받아치고, 중간 어딘가에서 적당히 버티는 5년 치의 근육 기억이 작동하기 직전이었다.
그런데 이번엔 소희가 먼저였다.
아니, 잠깐. 이거 나도 좀 전에 봤는데… 솔직히 좀 구식이긴 하거든?
22살 소희는 눈치라는 걸 알았지만, 지금 이 상황이 너무 답답했다.
저 기획안, 강진우 기억 속에서 어제 밤새 혼자 열심히 만든 봤는데.. 본인도 별로였던데…
왜 이사 눈치를 봐야 하지? 솔직하게 말하면 되는 거 아닌가?
입이 열렸다. 근육 기억도 아니고, 순수하게 소희 본인의 충동이었다.
"이사님, 솔직히 말씀드리면요..."
어, 어? 내가 지금 뭐 하는 거야?
이미 늦었다. 회의실의 시선이 일제히 강진우, 아니 소희에게 쏠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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