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의 8시간

제4막: 영해 해방구

by조삿갓

면사무소 마당에서 치솟았던 화염이 잦아들고, 매캐한 잿가루가 영해 장터 위로 고요히 내려앉고 있었다.


토지조사부와 세금 대장이 불타버린 자리. 그 너머에는 군도를 찬 스즈키도, 보병총을 겨누던 순사들의 모습도 없었다. 포항과 대구로 이어지는 전신망은 끊어졌고, 무기고는 결사대의 손에 장악되었다. 영해면 전체가 일제의 통제에서 벗어난, 온전한 해방구(解放區)가 된 순간이었다.


진우는 정규하가 건넨 낡은 회중시계의 초침을 내려다보며 입술을 깨물었다.


오후 2시. 창수면으로 달려간 기마대가 허탕을 치고 돌아오거나, 통신 두절을 감지한 헌병대 본대가 병력을 이끌고 당도하기까지 걸리는 시간. 진우가 미래의 지식으로 역산해 낸 이 해방구의 수명은 길어야 8시간 남짓이었다. 해가 지면, 일본군 정규 부대가 장터를 덮칠 터였다.


"다들 이리 오소! 밥 묵고 합시데이! 왜놈들 총통을 뺏었으마, 배때기부터 든든하게 채워야 할 거 아이가!"


장터 한구석, 연화의 우렁찬 목소리가 정적을 깼다. 국밥집 마당에는 무쇠 가마솥 세 개가 장작불 위에서 끓고 있었다. 연화는 숨겨두었던 소뼈와 무, 묵은 시래기를 털어 넣고 국자를 저었다. 그 부름에 장터 아낙네들이 치마폭과 봇짐 속에 숨겨둔 쌀과 보리, 된장을 꺼내 모여들었다. 누구의 지시도 없었지만, 백성들은 기꺼이 귀한 식량을 내어놓으며 거대한 식사를 준비하고 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영해 장터 위로 기이한 연회가 펼쳐졌다.


피 묻은 보병총을 쥔 칠성 앞으로 고기 국밥 한 그릇이 놓였다. 칠성은 총열을 허벅지에 얹은 채 숟가락을 쥐었다. 평생 소를 잡으면서도 내장 찌꺼기나 씹던 백정이었다. 그러나 지금 장터의 사람들은 그를 백정이 아닌, 자신들을 지켜낸 군대로 바라보고 있었다.


"국물 맛이... 달구마."


칠성의 탁한 눈에서 눈물이 뚝배기 안으로 떨어졌다. 서러움이 아니었다. 태어나 처음 누려보는 포만감이자 존엄이었다.


그 옆에서는 고아 소년 덕구가 사발에 얼굴을 파묻고 국밥을 들이마셨다. 며칠을 굶주린 위장으로 뜨거운 국물이 들어가자 사레가 들리면서도 숟가락을 놓지 못했다. 노병 최학수가 거친 손으로 덕구의 등을 쓸어내렸다. 베르단 소총을 멘 늙은 포수의 얼굴에도 오랜만에 안도감이 스쳤다.

지금 바로 작가의 멤버십 구독자가 되어
멤버십 특별 연재 콘텐츠를 모두 만나 보세요.

brunch membership
조삿갓작가님의 멤버십을 시작해 보세요!

계획없이 쓰고, 목적 없이 걷습니다. 오늘이 사라지지 않도록

61 구독자

오직 멤버십 구독자만 볼 수 있는,
이 작가의 특별 연재 콘텐츠

  • 최근 30일간 5개의 멤버십 콘텐츠 발행
  • 총 27개의 혜택 콘텐츠
최신 발행글 더보기
이전 15화무기고 점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