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에 피는 꽃

제2막: 폭풍을 준비하는 자들

by조삿갓

짐승의 사체를 매달아 두던 무쇠 살고리 위로, 누렇게 빛바랜 낡은 광목천들이 어지럽게 걸려 있었다.


거사를 이틀 앞둔 1919년 3월 16일의 깊은 밤. 영해면 성내리 외곽의 도축장 지하실은 살을 에는 바깥 삭풍을 막아선 채, 스무 명 남짓한 사내와 아낙들이 내뿜는 짙은 호흡과 체열로 빈틈없이 채워져 있었다. 평소라면 코를 찔렀을 짐승의 피비린내 위로, 갓 갈아낸 먹물과 송진 타는 매캐한 냄새가 층층이 내려앉았다.


"조심하소. 귀한 천입니데이. 피 한 방울 안 묻게 단디 잡으라카이."


연화가 투박한 쇳가위로 광목천을 마름질하며 나직하게 주의를 주었다.


육중한 참나무 도마 위에는 고깃덩어리 대신 새하얀 천들이 반듯하게 펼쳐졌다. 평생 소의 각을 뜨고 내장을 파헤치던 백정 칠성의 우람한 손과, 호미와 낫 자루를 쥐느라 지문마저 닳아 없어진 농사꾼 권태원의 거친 손가락이 가느다란 붓털과 붉은 안료를 움켜쥐고 있었다. 난생처음 짐승의 피나 흙먼지가 아닌 것을 쥔 손끝이 미세하게 떨렸다.


"이래 둥글게 그리는 기 맞능교? 자꾸 선이 삐뚤어지는데..."


칠성이 이마에 맺힌 굵은 땀방울을 훔치며 끙끙거렸다. 그가 그려낸 태극 문양은 원형이라기보다 찌그러진 타원에 가깝고, 건곤감리의 네 괘(卦)는 굵기와 간격이 제멋대로였다. 권태원이 그린 태극기는 아예 푸른색과 붉은색의 위아래가 뒤바뀌어 있었다. 근대식 학교의 규격화된 교육을 단 하루도 받아본 적 없는 이 민초들에게, 국가를 상징하는 기하학적 비율과 대칭의 법칙 따위는 애초에 존재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 삐뚤빼뚤하고 엉성한 붓질 속에는, 먼 훗날 공장의 기계로 매끄럽게 찍어낼 정형화된 태극기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맹렬한 핏덩이 같은 혼(魂)이 깃들어 있었다.


정규하는 낡은 의자에 단정히 앉아, 백성들이 투박하게 그려낸 그 깃발들을 하나하나 애정 어린 눈으로 들여다보고 있었다.


"비율이 어긋나고 색이 번진 들 어떠하겠느냐. 이 천 조각은 궐 안에 걸어둘 번지르르한 장식품이 아니다."


정규하가 칠성이 그린 깃발 위로 가만히 손을 얹었다.


"사흘 뒤, 무자비한 총칼 앞을 향해 걸어갈 우리 삼천 명 백성들의 맨가슴을 덮어줄 유일한 방패이자, 우리의 피가 이 땅의 흙으로 스며들 때 그 육신 위를 덮어줄 수의(壽衣)다. 너희가 꾹꾹 눌러 담은 그 붓질 하나하나가, 곧 이 나라의 숨통이 아직 끊어지지 않았다는 명백한 증거이니라."


그 서늘하고도 비장한 말에, 붓을 쥐고 있던 사내들의 굽은 등허리가 묵직하게 펴졌다. 연화는 눈시울을 붉히며 더욱 맹렬하게 광목천을 잘라냈고, 사내들은 묵묵히 먹물을 찍어 진흙 바닥을 뒹구는 야차들처럼 거침없이 태극을 그려나갔다.


진우는 지하실 구석에 팔짱을 낀 채 기대어 서서, 호롱불 아래서 꿈틀거리는 그 날것의 생명력을 숨죽여 지켜보았다.


자신이 2026년의 정적이고 건조한 전시관에서 보았던 증조부의 유품. 굳은 핏자국이 묻어 있던 그 거대한 태극기가 단순히 교과서 속 사료(史料)가 아니었음을, 진우는 비로소 온몸으로 깨닫고 있었다. 박물관의 차가운 진열장 뒤에는, 이토록 뜨겁고 불완전하게 살아 숨 쉬는 인간들의 밤이 맥박치고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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