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막: 낯선 봄의 이방인
도축장 지하실.
진우가 스즈키에게 걷어 차인 정강이를 절뚝거리며 가파른 계단을 내려갔을 때, 눅눅한 어둠 속에서는 이미 십여 명 남짓한 사내들이 뜨거운 체열을 뿜어내고 있었다. 식민지의 가장 밑바닥을 기어 다니던 무지렁이들이었다.
가운데 놓인 육중한 참나무 도마 위로 호롱불 하나가 위태롭게 흔들리며, 사내들의 거칠고 투박한 윤곽을 비췄다.
칠성의 우람한 등거리를 지나, 구석진 흙벽에 기대어 녹슨 곰방대를 뻐끔거리는 늙은이가 보였다. 1907년 대한제국 군대가 강제 해산되던 날, 시위대(侍衛隊) 소속으로 광화문에서 일본군 정규 병력과 시가전을 벌였던 늙은 포수 최학수였다. 한쪽 다리를 절고 있었으나 짚신 아래로 드러난 발목에는 지워지지 않는 탄환의 흉터가 훈장처럼 박혀 있었다. 호롱불에 반사되는 맹금류 같은 안광은 여전히 시퍼런 살기를 품고 번뜩였다.
그 옆으로는 뼈마디가 툭 불거지고 손톱 밑에 새까만 흙 때가 낀 농사꾼 권태원이 낡은 낫의 자루를 꽉 쥐고 있었고, 연화의 치마폭 뒤에는 겁에 질린 채 커다란 눈망울만 굴리고 있는 깡마른 십 대 고아 소년 덕구가 웅크려 있었다.
어느 누구도 영웅의 고결한 골격을 갖추지 못했다. 무기라고는 날이 빠진 발골도와 녹슨 낫, 쇠스랑, 그리고 지게 작대기가 전부인 이 오합지졸의 무리. 이들의 모습은 제국주의의 기관총 포화 앞에서는 불과 몇 분 만에 찢겨나갈 섶단이나 다름없었다.
그러나 그 남루한 육신들이 뿜어내는 날것의 결기만큼은, 진우가 딛고 온 그 어떤 풍요로운 시대의 합리성으로도 감히 측량할 수 없을 만큼 거대하고 맹렬했다.
도마 앞의 낡은 나무 의자에는 정규하가 앉아 있었다. 그의 순백색 명주 두루마기 위로 흔들리는 호롱불 빛이 무겁게 내려앉았다. 정규하는 벼루에 먹을 갈고, 짐승의 피가 검게 엉겨 붙은 도마 한편에 거친 한지(韓紙)를 쫙 펼쳐놓은 채 붓을 들고 있었다.
"이름을 적어라."
정규하의 맑고 서늘한 음성이 지하실의 탁한 침묵을 갈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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