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막: 낯선 봄의 이방인
매끄러운 나일론 재킷과 푸른 데님 바지를 벗어던지고, 칠성이 던져준 낡고 거친 삼베적삼을 걸치는 순간 진우의 살갗 위로 붉은 발진이 오소소 돋아났다.
까끌까끌하고 억센 식물 섬유질이 맨살을 사정없이 긁어대는 그 생경한 감각은, 진우가 머나먼 미래에서 완벽하게 벗어났음을 알렸다. 진우는 아궁이에서 긁어낸 시커먼 재와 진흙을 섞어, 굳은살 하나 없이 희고 매끄러운 손등과 얼굴 위로 거칠게 문질렀다. 머리에 푹 눌러쓴 낡고 때 탄 패랭이 모자 아래로, 이방인의 흔적을 철저하게 지워내야만 했다.
"몸뚱이를 더 굽히소. 어깨를 펴고 눈을 똑바로 뜨고 댕기마, 순사 놈들이 단박에 사상범이나 불령선인으로 의심한데이."
국밥집 뒷마당에서 가마솥을 닦던 연화가 목소리를 한껏 낮추어 속삭였다. 식민지의 백성들에게, 주눅 든 어깨와 바닥을 향한 시선은 비굴함이 아니라 살아남기 위한 가장 필수적인 보호색이었다.
그러나 평생을 자유롭고 평등한 세상에서 등뼈를 수직으로 꼿꼿하게 세우고 살아왔던 진우에게, 누군가를 향해 무조건적인 굴종의 자세를 취한다는 것은 머리로는 이해할지언정 육신이 쉽게 허락하지 않았다.
그 찰나였다.
장터의 왁자지껄하던 소음이 찬물을 끼얹은 듯 일순간에 얼어붙었다.
철컥- 척. 철컥- 척.
소고기 등급을 흥정하던 칠성의 고함도, 국밥을 게걸스럽게 떠먹던 촌부들의 숟가락 소리도 멎었다. 가죽 장화에 박힌 쇠징이 얼어붙은 흙바닥을 일정한 간격으로 짓이기는, 오만하고도 맹렬한 발걸음 소리만이 장터의 무거운 공기를 예리하게 찢으며 다가오고 있었다.
영해 주재소장, 스즈키 겐지.
그는 평범한 일본인 순사들과는 뿜어내는 기운부터가 달랐다. 러시아 연해주 일대에서 숱한 조선인 무장 투사들의 목을 베며 공을 세웠다는 그는, 핏줄에 이국의 피가 섞인 탓인지 유독 창백한 피부와 얼음장처럼 차가운 푸른빛의 눈동자를 가지고 있었다. 허리춤에 찬 길고 예리한 군도(軍刀)가 그의 걸음마다 번쩍이며 식민지 백성들의 숨통을 무언으로 조이고 있었다.
스즈키의 푸른 눈동자는 매처럼 날카롭게 장터 구석구석을 훑었다. 영해 장터에 기묘한 긴장감이 돌고 있음을, 짐승의 후각을 가진 이 노련한 사냥개는 이미 본능적으로 감지하고 있었다.
진우는 국밥집 처마 밑에서 장작을 패기 위해 무거운 도끼를 쥐고 있었다. 스즈키의 발걸음 소리가 가까워질수록 진우의 심장 박동은 쉼 없이 요동쳤다.
'고개를 숙여라. 눈을 마주치지 마라.'
머릿속으로는 수없이 되뇌었으나,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제국주의의 실체 앞에서 진우의 육신은 긴장하여 나무토막처럼 굳어버리고 말았다. 굽혀야 할 등허리는 무의식 중에 수직으로 꼿꼿이 펴졌고, 바닥을 향해야 할 시선은 도끼 자루를 쥔 채 허공을 맴돌았다.
그 미세한 균열을, 스즈키가 놓칠 리 없었다.
우뚝.
가죽 장화의 걸음이 진우의 등 뒤에서 멈춰 섰다. 서늘한 칼바람과 함께 독한 궐련 냄새, 그리고 가죽을 닦은 비릿한 기름 냄새가 진우의 폐부를 훅 찌르고 들어왔다.
"거기, 네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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