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명의 정규하

제1막: 낯선 봄의 이방인

by조삿갓

철컥, 척. 철컥, 척.

장터의 얼어붙은 흙바닥을 짓이기는 쇠징 박힌 군화 소리가 골목 어귀를 무자비하게 스치고 지나갔다. 허벅지에 찬 군도가 부딪히며 내는 마찰음은 서늘했다.


진우는 짚단 더미에 파묻힌 채, 들짐승처럼 숨을 죽였다. 코끝을 찌르는 끔찍한 악취보다, 뼛속 시린 칼바람보다 더 진우를 미치게 만드는 것은 따로 있었다. 조금 전까지 박물관에서 활자로만 존재하던 일제 헌병을 불과 몇 뼘 앞에서 마주하고 있다는 끔찍한 현실이었다.


군화 소리가 골목 저편으로 완전히 멀어지고 나서야, 입구를 막아섰던 연화의 잔뜩 굽은 어깨가 바닥으로 툭 떨어졌다.


"살았구마. 하마터면 이 실성한 양반내기 하나 땜에 장터 사람들 다 끌려가서 뼈가 부서질 뻔했데이."


연화가 가슴을 쓸어내리며 진우를 향해 돌아섰다. 그녀의 억센 손이 진우의 등짝을 세게 후려쳤다.


"이보시오, 총각! 이제 순사 놈들 지나갔으이 퍼뜩 고향으로 가소. 그 상투도 안 튼 맨머리에 해괴한 양복 쪼가리 걸치고 영해 바닥을 얼쩡거리다간, 내일 아침 대구 형무소 찬 바닥에서 거적때기에 말린 시체로 발견될 낍니더. 알겠능교!"


"저... 정말로 지금이 3월 11일입니까?"


진우의 쩍쩍 갈라진 입술 사이로 절망적인 물음이 다시 한번 새어 나왔다. 연화가 기가 차다는 듯 다시 입을 열려던 찰나였다.


"연화야, 무어라 소란이냐."


골목의 짙은 그림자를 밟으며, 세상의 모든 탁한 소음을 일순간 소거(消去)시키는 낮고 맑은 음성이 내려앉았다. 진우는 짚단 더미에서 홀린 듯 고개를 들었다. 눈부시게 하얀 명주 두루마기를 단정하게 차려입은 사내가 흙먼지 날리는 골목 안으로 소리 없이 걸어오고 있었다.


깡마른 체구였으나 그의 척추는 대나무처럼 수직으로 꼿꼿했고, 깊게 가라앉은 동공 속에는 차가운 이성과 끓어오르는 열기가 충돌하며 서슬 퍼런 안광(眼光)을 뿜어내고 있었다. 이 비좁은 골목에 어울리지 않는, 티끌 하나 없는 고결함이었다.


진우의 숨이 턱 막혀왔다. 어린 시절, 명절마다 제사상 위에 놓여 있던 낡은 흑백 사진 속의 주름진 노인. 매끄러운 오석(烏石) 기념비의 가장 높은 곳에 새겨져 있던 차가운 이름 석 자. 그 화석처럼 굳어 있던 가문의 역사가, 지금 삼십 대의 피 끓는 꼿꼿한 젊은 유학자의 육신을 입고 진우의 눈앞에서 생생하게 살아 숨 쉬고 있었다.


"지사님... 정규하 지사님..."


진우의 핏기 가신 입술이 파르르 떨리며 짐승 같은 신음을 토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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