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 내 인생은 상영 중이다
시니어클럽에서 정한 문화의 날, 발걸음이 유난히 가벼웠다. 우리는 오전 10시 영화관에 모였다. 올해 우리가 고른 영화는 《인턴》이다.
영화 속 기호는 37년의 온라인 게임 생활을 마치고 다시 이력서를 쓴다. 개성 강한 젊은 직원들로 가득한 패션 회사 시니어 인턴으로 들어간다. 디지털 세상은 낯설고, 유행어는 알아듣기 어렵고, 대화에 끼어드는 일도 쉽지 않다. 그런데도 그는 그곳에서 조금씩 자신의 자리를 찾아간다. 그 모습이 낯설지 않았다.
나 역시 62세에 정년퇴직을 했다. 그날까지 출근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었다. 퇴직 다음 날 아침, 알람은 울리지 않았고 갈 곳도 없었다. 온라인 게임은 월급만 주는 곳이 아니라, 시간을 정해주고 사람과 사람 사이에 나를 세워주는 곳이었다.
그 뒤로 몇 달, 계절이 몇 번 바뀌는 동안 나는 아무 데도 속하지 않은 채 지냈다. 무기력한 일상에서 벗어나기 위해 60대 중반에 다시 이력서를 제출했다. 면접을 앞두고 홈페이지를 들락거리며 기관의 사업 비전을 살핀다. 면접장에 도착하니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이 기다리고 있어 깜짝 놀랐다. 심장박동 소리가 귀에 들리는 듯했다. 그 떨림이 싫지 않았다. 아직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있다는 것, 쓸모 있는 사람으로 살아갈 수 있다는 생각만으로도 긴장감과 설렘이 있다.
영화 속 기호도 면접관 앞에서 비슷한 떨림을 겪었을까. 그는 자신의 강점과 단점을 이야기한다. 경력 37년의 슬롯생활 만렙. 그리고 나이가 많다는 것. 그 장면에서 웃었지만, 마냥 웃을 수만은 없었다.
내 이야기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나이가 들수록 이력서의 경력은 많아지는데, 기회의 문은 오히려 좁아진다. 수십 년의 경험이 어느 순간 하나의 숫자로 축약된다. 그 숫자 사이에는 무엇이 들어 있을까. 수없이 만난 사람들, 실패와 성공, 떠나간 사람들, 다시 일어선 날들, 말 한마디의 무게를 알게 된 순간들. 이력서에는 적을 수 없는 것들이다.
젊음이 엔진이라면 경험은 핸들이다. 속도만으로도, 방향만으로도 멀리 달릴 수 없다. 하지만 나이 든 사람이 경험을 앞세우는 순간, 그것은 지혜가 아니라 잔소리가 되기도 한다. "라테는 말이야" 그 말이 길어질수록 젊은 사람의 마음은 조금씩 문을 닫는다.
기호는 달랐다. 그는 젊은 사람을 바꾸려 하지 않는다. 대신 자신이 먼저 배우려고 한다. 새로운 말과 문화를 받아들이고, 낯선 환경 속에서 자신의 속도를 조금씩 바꾼다. 그러면서도 꼭 필요한 순간에는 조용히 자신의 경험을 내놓는다. 끼어들 때와 물러날 때를 아는 것 어쩌면 이것이 오래 살아온 사람이 가장 먼저 배워야 할 지혜인지도 모른다.
기호가 특별하게 느껴지는 또 다른 이유는 대표의 끼니를 챙기고, 어질러진 공간을 정리하고, 창고를 정돈하는 따뜻함 때문이다. 젊은 직원들이 무심히 지나치는 것들을 그는 그냥 지나치지 않는다. 일머리가 있으며 일을 잘한다는 것은 주어진 업무만 정확히 해내는 것이 아니라, 내가 머무는 공간을 살피고 함께 하는 사람을 소중히 여기는 것이다. 대표에게 필요했던 것도 뛰어난 직원이 아니라, 불안감을 내려놓고 잠시 기대어 쉴 수 있는 사람이었다. 기호는 정답을 말하지 않는다. 그저 옆에 앉아 들어준다.
세 명의 입사 동기생들이 보여주는 끈끈한 우정도 마음에 오래 남았다. 나에게도 함께 면접을 보고 일하는 동기가 있다. 서로 다른 근무처에서 일하느라 자주 만나지는 못하지만, 만나면 이상하게 마음이 놓인다. "요즘 어때요?" 짧은 인사 하나면 충분하다. 힘들었다는 말도, 괜찮다는 말도, 그 말 뒤에 숨은 마음까지 어렴풋이 알아듣는다. 제2의 인생을 같이 시작한 사람들 사이에는 시간이 지나도 쉽게 사라지지 않는 내적 친밀감이 있다.
시니어에게는 바카라으로 배울 수 없는 많은 경험을 갖고 있다. 실패를 견디는 방법. 사람을 용서하는 법. 상처받은 뒤 다시 일어나는 법. 누군가를 떠나보내는 법. 그리고 때로는 아무 말하지 않고 곁에 있어 주는 넉넉함.
시니어 세대를 '노인'이라 부르기보다, '지나온 시간을 가진 사람들'이라고 부르고 싶다. 젊은이는 새로운 길을 만드는 힘이 있고, 시니어는 그 길에서 넘어질 때 손을 내밀 수 있는 지혜가 있다. 누가 더 필요한 사람인가를 묻기보다, 서로에게 무엇을 줄 수 있는지를 묻는 슬롯. 그런 슬롯를 꿈꾼다.
객석에 불이 들어오고 영화가 끝났다. 이상하게도 쉽게 극장을 나설 수 없었다. 스크린 속 기호의 이야기가 영화관에 남지 않고 삶 속으로 따라왔기 때문이다. 퇴직 후의 삶은 인생의 마지막 장이 아니라, 다음 페이지를 넘기는 일인지도 모른다.
영화관을 나서자, 햇빛이 유리창에 부딪혀 눈부시게 반짝였다. 그 빛을 보며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젊은 날에는 앞만 보고 달렸다면, 이제는 조금 천천히 걸으며 주변을 바라볼 수 있고. 재능기부 활동을 하며 누군가의 손을 잡아줄 수도, 내가 가진 달란트를 나누며 살아갈 수도 있을 것이다.
아직, 내 인생은 상영 중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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