몸이 기억하는 시간
그날 아침, 수영장에는 낯선 장면이 펼쳐졌다. 수영모와 수경만 쓴 채 풀장을 향해 걸어오는 어르신을 보며 사람들은 다급히 손짓을 했다. 다시 들어가라는 손짓을 그는 전혀 다르게 받아들였다. 빨리 오라는 줄 알고 웃으며 종종걸음으로 다가왔다. 순간 수영장 안에는 묘한 정적이 흘렀다.
7년 만에 다시 문을 연 동네 수영장에서 벌어진, 아주 난처하면서도 이상하게 따뜻했던 아침이었다. 코로나19로 굳게 닫혔던 동네 수영장은 오랫동안 문을 열지 않았다. 시설 노후로 개보수에 들어간다는 안내문만 덩그러니 붙어 있었다.
학수고대하던 시민들은 지난 6월 리모델링을 마치고 다시 개장한 수영장으로 물 만난 고기처럼 몰려들었다. 기초반부터 연수반까지, 새벽부터 저녁 반까지 접수 회원이 2천 명이 넘었다고 한다.
나도 그중 한 사람이다. 한때 나는 쉬지 않고 스무 바퀴를 거뜬히 돌았고, 물살이 오르내릴 때마다 접영으로 몸을 띄워 나비처럼 가볍게 날아올랐었다. 수영을 10년 넘게 생활화했기에 물속에서 하는 운동은 편안하고 익숙했던 시절이었다. 하지만 코로나 때부터 7년을 쉰 몸은 그 나비를 까맣게 잊은 듯했다. 첫 수업부터 현실을 자각했다. 25미터 풀을 두 바퀴 돌았을 뿐인데 숨이 턱까지 차올랐고, 심장이 '이제 그만하자'라고 아우성쳤다. 첫 강습 다음 날에는 온몸의 근육이 놀랐는지 욱신거렸다. 몸은 거짓말을 하지 않고 기억하지만, 시간을 건너뛰지는 못한다.
바쁜 일정이지만 일주일에 3번 정도는 수영장으로 향했다. 석 달쯤 지나자, 조금씩 익숙해졌다. 열 바퀴는 쉬지 않고 따라갈 수 있게 됐다. 예전의 물개 시절로 돌아간 것은 아니지만, 물속에서 숨을 고르고 팔을 뻗다 보면 잊고 지냈던 몸의 리듬이 조금씩 돌아오는 것이 느껴졌다.
지난 금요일 오전, 수영장에서 그 일이 벌어졌다. 10시 강습을 앞두고 샤워장으로 들어갔다. 사람들이 한꺼번에 몰리니 샤워장은 금세 김으로 뿌옇게 흐려졌다. 따뜻한 물줄기와 비누 향, 여기저기서 들려오는 목소리 속에서 사람들은 각자 몸을 씻고 수영복을 챙겨 입었다.
잠시 후 풀장에는 초급반부터 연수반 회원들이 각자의 레인에 자리를 잡았다. 한쪽에서는 자유 수영이 시작되고, 걷기 전용 레인에서 재활 운동을 하는 사람들이 천천히 물속을 걸었다. 물 위에는 형형색색의 수영모가 꽃밭처럼 떠 있었다.
10시 정각, 안전요원의 호각이 울렸다.
"삑!"
강사의 구령에 맞춰 회원들이 체조를 따라 하며 어깨를 펴고 허리를 돌린다. 어디선가 짧은 외마디 비명이 들렸고, 모두의 시선이 입구 쪽으로 향했다. 회원 한 분이 수영모와 수경만 착용한 채 풀장을 향해 걸어오고 있었다.
순간 수영장 전체가 얼어붙었다. '어떻게! 다시 들어가세요!' 몇 사람은 웃음을 참느라 입술을 깨물었고, 몇 사람은 황급히 고개를 돌렸다. 웃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같은 반 회원들이 재빨리 그의 주위를 에워쌌다. 누군가는 수영모를 벗어 다른 회원에게 씌워 주었고, 젊은 회원 한 명은 번개처럼 샤워장으로 달려갔다.
잠시 후 그가 들고 온 것은 샤워장 수도꼭지에 걸어두고 나온 수영복이었다. 회원들은 다시 둥글게 모였다. 물속에서 벌어진 작전이었다. 사람들이 몸으로 시야를 가려주는 동안 그는 무사히 수영복을 입었다. 몇몇 회원은 수영모를 서로 바꿔 썼다. 수영장에서는 수영모 색깔로 사람을 구분한다. 그런데 그날만큼은 아무도 누구인지 알아볼 수 없었다. 모두가 기꺼이 서로의 수영모를 바꿔 썼기 때문이다.
마침내 호각이 다시 울렸다.
"삑!"
거짓말처럼 수업이 재개됐다. "자, 자유형 200미터. 턴은 플립 턴으로 출발!" 강사의 지시가 내려지고 회원들은 일제히 내달린다.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운동은 다시 시작됐다. 하지만 사람들의 머릿속에는 조금 전의 장면이 선명하게 남아 있었다. 강습이 끝난 뒤 탈의실과 샤워장에서는 작은 웅성거림이 이어졌다.
"아까 그분 봤어요?"
"글쎄요. 잘 모르겠는데요."
결국 정확히 아는 사람은 없었다. 생각해 보면 비슷한 일은 예전에도 있었다고 한다. 남자 탈의실 쪽에서도 한 회원이 수영복을 입지 않은 채 밖으로 나와 사람들이 황급히 뒤쫓아 들어간 적이 있었다고 했다. 나이가 들면 깜빡깜빡하는 일이 늘어난다. 그 이후 수영장에는 새로운 규칙이 생겼다. '샤워 후 수영복을 먼저 입고, 수모를 쓰고 입장할 것.' 수영장 입구에는 커다란 전신거울도 새로 생겼다. 그리고 거울 위에는 아주 큼지막한 글씨가 붙어 있다.
'수영복 착용 후 입장.'
거울은 말이 없지만 꽤 많은 것을 알려준다. 그 회원이 잊은 것은 수영복만이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나 역시 스무 바퀴를 돌던 몸의 감각을 잃은 채 다시 두 바퀴부터 시작해야 했으니, 우리는 저마다 다른 방식으로 무언가를 잊고, 또 되찾아 가는 중이다.
수영장은 단순히 운동만 하는 곳이 아니다. 누군가는 아픈 무릎을 달래기 위해 물속으로 들어오고, 누군가는 굽은 허리를 펴려고 걷기 전용 레인을 찾는다. 육지에서는 계단 하나 오르기 힘들던 사람이 물속에서는 가볍게 걷는다. 굳었던 관절이 부드러워지고 거칠던 숨도 차츰 안정된다. 오전 수영장의 회원은 어르신들이 많은 수를 차지한다. 젊은 사람도 숨이 차도록 고강도로 운동하고, 나이 든 사람도 힘차게 물살을 가른다.
그 모습을 보면서 내 몸을 다시 바라보게 됐다. 예전의 기록을 생각하며 다시 시작했지만, 몸은 이미 다른 시간을 지나와 있다. 몸은 기억하지만, 시간을 건너뛰지는 못한다. 예전의 나를 단숨에 되찾으려는 욕심보다, 오늘의 몸으로 차츰차츰 나아가야 한다는 것을 깨닫는다.
수영장 바닥으로 햇빛이 잘게 부서져 들어온다. 물결이 흔들릴 때마다 빛도 함께 흔들린다.
물속에서는 말이 필요 없다. 한 팔을 뻗고, 숨을 내쉬고, 발차기한다. 한 바퀴를 돌고 다시 한 바퀴를 돈다. 오늘도 접영을 시도한다. 완벽하지는 않지만, 팔을 뻗어 몸을 띄울 때마다 잊고 있던 나비가 물살 위로 조금씩 다시 날아오르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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