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마다 다른 계절
오늘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 날입니다.
세상의 소음도, 누구의 기대도 잠시 문밖에 두고
오롯이 나에게 머무는 날.
아침부터 와인 한 잔을 따라 소파에 몸을 기댑니다.
창문을 열어 두고, 음악도 틀지 않은 채 눈을 감으면 새들의 노랫소리가 조용히 시간을 건너옵니다.
이토록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시간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이제는 괜찮습니다.
그저 오늘의 이 시간이 좋습니다.
생각도 바람처럼 흘러갑니다.
붙잡으려 할수록 멀어지고, 흘려보낼수록 가벼워지는 것들.
문득 궁금해집니다.
내 안의 수많은 생각들은 도대체 어디에서 와 어디로 흘러가는 걸까.
살아갈수록 한 가지는 분명해집니다.
세상에는 똑같은 사람은 없다는 것.
누군가는 침묵으로 마음을 전하고,
누군가는 환한 웃음으로 세상을 엽니다.
누군가는 바람처럼 자유롭고,
누군가는 나무처럼 묵묵히 한자리를 지킵니다.
그래서 사람을 만나는 일은 언제나 한 권의 바카라을 펼치는 일과 닮았습니다.
정현종 시인님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사람이 온다는 건 실은 어마어마한 일이다.
그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그의 미래가 함께 오기 때문이다.
한 사람이 내 앞에 온다는 것은 그 사람의 시간 전체가 함께 오는 일입니다. 그래서 사람은
잠깐의 만남만으로 쉽게 평가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닙니다.
와인도 그렇습니다.
세상에는 수천 종의 와인용 포도가 있고,
저마다 다른 계절을 지나 저마다 다른 향기를 품습니다.
처음부터 마음을 사로잡는 와인이 있습니다.
잘 익은 과일 향으로 환하게 웃는 사람처럼 다가오는 와인.
반대로 말수가 적은 사람처럼 천천히 곁을 내어주는 와인도 있습니다.
처음에는 특별함을 알지 못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비로소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주는 와인.
우리는 그런 와인도 사랑하게 됩니다.
사람들은 자신과 닮은 와인을 좋아하기도 하고,
자신에게 없는 모습을 가진 와인에 끌리기도 합니다.
어쩌면 우리는 와인을 고르는 것이 아니라,
우리와 닮은 이야기를 만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기대와 다른 맛을 만나는 날도 있습니다.
처음에는 설레었지만 끝으로 갈수록 조금 아쉬움을 남기는 와인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실패가 아닙니다.
그 와인은 내가 어떤 향을 좋아하는 사람인지,
어떤 여운에 오래 머무는 사람인지를 알려주었기 때문입니다.
다음 잔을 더 깊이 이해하게 만드는 시간.
사람과의 만남도 그렇지 않을까요.
모든 인연이 오래 머물지는 않지만,
모든 만남은 우리 안에 작은 향기를 하나씩 남깁니다.
와인도, 사람도. 나도.
알아간다는 것은
바꾸는 일이 아니라 이해하는 일입니다.
차이를 인정하고, 다름을 품어주는 일.
어쩌면 사랑이란 그 작은 마음에서 시작되는 것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와인에는 등급이란 것이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사람이 만든 기준입니다.
자연은 포도를 서로 비교하지 않습니다.
좋은 떼루아에서 자란 포도도,
거친 땅에서 자란 포도도,
저마다의 계절을 견디며
자신만의 속도로 익어갑니다.
그리고 결국,
자신을 알아봐 줄 사람을 만납니다.
사람도 그렇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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