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병이 들려주는 이야기

와인 라벨은 와인의 자기소개서다

by행운의 여신


우리는 사람을 처음 만나면 이름을 묻습니다.

어디에서 왔는지,
어떤 시간을 지나 여기까지 왔는지,
그리고 어떤 사람인지.

왜일까요?

그 사람을 조금은 알고 싶어서입니다.

와인도 다르지 않습니다.
와인이 우리에게 건네는 첫인사는 라벨입니다.

"안녕하세요.
저는 이런 곳에서 태어나
이런 계절을 지나
당신 앞까지 왔습니다."

어떤 와인은 포도의 이름으로,
어떤 와인은 태어난 마을의 이름으로 자신을 소개합니다.


이름은 그저 부르는 말이 아닙니다.
'나는 누구인가.'
그 짧은 한 문장입니다.

사람의 이름을 오래 기억하게 되면 괜히 조금 가까워진 것 같은 마음이 드는 것처럼,
와인의 이름을 알게 되는 순간
그 병도 더 이상 낯선 풍경이 아닙니다.

이어 와인은 자신이 태어난 곳을 이야기합니다.

사람도 살아온 곳의 공기를 닮고,
포도는 자라난 땅을 닮습니다.

햇살을 오래 품은 언덕.
새벽안개가 매일 스쳐 가던 포도밭.
계곡을 따라 불어온 바람.

와인은
그 풍경을 잊지 못한 채 우리 앞에 도착합니다.

그래서 같은 품종의 포도라도
어느 땅에서 태어났는지에 따라
전혀 다른 이야기를 품게 됩니다.

그리고 와인은 사람의 생년월일처럼
빈티지라는 숫자로 자신을 소개합니다.

포도가 가장 빛나던 계절.
한 해의 햇살과 비, 그리고 시간이
숫자 하나가 되어 남아 있는 것입니다.

그 숫자를 바라보고 있으면
문득 궁금해집니다.


이 와인은 어떤 여름을 기억하고 있을까.
어떤 비를 맞았을까.
어떤 바람을 지나왔을까.


시간은 숫자로 적혀 있지만,
사실은 그 와인의 계절의 기억입니다.

사람에게 키와 체격이 있듯,
와인에도 저마다의 체온이 있습니다.


가볍게 웃으며 다가오는 와인이 있고,
말없이 오래 곁에 머무는 와인도 있습니다.


부드럽게 마음을 열어 주는 와인이 있는가 하면,
천천히 온기를 남기는 와인도 있습니다.

이렇게 와인의 이야기를 알아가다 보면
어느 순간
그 와인이 살아온 이야기보다
앞으로
나와 함께 써 내려갈 이야기가
더 기다려집니다.

누군가는 몇 번의 계절을 건너
이 한 병을 만들었고,
이제 그 마지막 이야기는
내 차례가 됩니다.

누구와 잔을 부딪칠지,
어떤 웃음을 남길지,
무슨 말을 꺼내게 될지.

와인은
그 순간까지 기다리고 있었는지도 모릅니다.

우리는
너무 많은 것들을 스쳐 지나갑니다.


사람도,
계절도,
하루도.
그 이름조차 오래 붙잡지 못한 채..


그래서일까요.
저는 라벨이 화려한 와인보다
다음 이야기가 궁금한 와인이 좋습니다.


사람도 그렇습니다.

와인 한 병 앞에서 조금 느려지고 싶은 마음.
어떤 시간을 살아왔는지.
무엇을 품고 여기까지 왔는지.
그리고
앞으로 어떤 이야기를 써 내려갈지..


다음에 와인 한 병을 집어 들게 된다면
가격보다 먼저
라벨을 읽어보세요.


그 안에는
한 사람의 손길이 있고,
기다림이 있고,
계절이 있습니다.

한 병의 와인은
자신을 마시기 전에
먼저 자신의 이야기를 읽히기를 기다리는
한 권의 작은 여행기입니다.

그리고
그 여행기의 마지막 장은
언제나
그 와인을 마시는 사람이 완성합니다.



※ 잠깐! 읽기 전에 확인해 주세요


와인 초보자도 한눈에 알아볼 수 있도록 꾸며본 가상의 연출 이미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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