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에서 우리는 와인의 색과 향이 들려주는 이야기를 함께 걸어왔습니다.
레드 와인이 왜 붉은빛을 품게 되는지,
화이트 와인이 왜 맑고 산뜻한 향을 지니는지,
그리고 로제가 왜 노을처럼 부드러운 분홍빛을 닮았는지도 알게 되었습니다.
이제 와인 한 병을 마주하면 예전보다 조금은 편안한 마음이 드실지도 모르겠습니다.
와인은 생각보다 어려운 존재가 아니라
오늘의 시간을 함께할 한 잔을 고르는 일이니까요.
어떤 날에는 따뜻한 파스타와 함께 부드러운 레드 와인이 잘 어울릴 수도 있습니다.
싱그러운 샐러드와 해산물에는 산뜻한 화이트 와인이 더욱 기분 좋게 다가오고,
햇살 좋은 오후,
친구들과 웃음이 가득한 자리라면
반짝이는 스파클링 와인이나
은은한 로제 와인이 그 시간을 더욱 환하게 만들어 줄지도 모릅니다.
음식에 맞춰 골라도 좋고,
계절에 맞춰 골라도 좋습니다.
오늘의 기분을 따라 골라도 괜찮습니다.
그리고 아무 이유 없이
'오늘은 왠지 이 병이 마음에 든다.'는 작은 끌림을 따라 선택한 와인이 의외로 기억에 남는 와인이 되기도 합니다.
와인을 고른다는 것은
오늘의 나와 가장 잘 어울리는 한 잔을 만나는 일이니까요.
그런데도 와인숍이나 마트의 와인 코너 앞에 서면 우리는 다시 한번 걸음을 멈추곤 합니다.
수많은 병들이 조용히 줄지어 서 있고,
낯선 이름과 익숙하지 않은 언어,
처음 보는 숫자들이 라벨 위를 빼곡히 채우고 있습니다.
어떤 병은 오래된 성처럼 묵직해 보이고,
어떤 병은 햇살을 담은 유리병처럼 맑게 빛납니다.
그 앞에 서 있으면 문득 이런 생각이 스쳐 지나갑니다.
어떤 걸 골라야 하지.
혹시 잘못 고르면 어떡하지.
손을 뻗었다가 다시 내려놓고,
가격표만 한참 바라보다 조용히 발길을 돌린 적도 있으셨을 것입니다.
저 역시 그랬습니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 보면
우리는 커피를 마실 때 원두의 품종을 모두 외우지 않습니다.
빵을 고를 때도 밀이 어느 들판에서 자랐는지 알지 못합니다.
그저 오늘 먹고 싶은 것을 고를 뿐입니다.
와인도 처음부터 비싼 와인을 골라야 할 이유도 없습니다.
어떤 와인은 첫 모금에 마음을 사로잡고,
어떤 와인은 시간이 지난 뒤에야 비로소 좋아지기도 합니다.
사람과 사람이 가까워지듯,
와인도 조금씩 알아가는 시간이 필요합니다.
좋아하는 와인을 찾는다는 것은
좋아하지 않는 와인을 만나보는 경험까지도 함께 품는 일입니다.
그 작은 경험들이 하나둘 쌓이다 보면,
어느새 자신의 취향이 조용히 나타나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어느 날,
예전처럼 오래 망설이지 않는 자신을 발견하게 됩니다.
익숙한 이름 하나가 반갑게 보이고,
한 번 마셔 보았던 품종이 떠오르기도 하고
'오늘은 가볍게 마시고 싶다.'
'오늘은 조금 묵직한 와인이 좋겠다.'
그런 생각들이 자연스럽게 마음속에 떠오릅니다.
그때 비로소 깨닫게 됩니다.
와인을 고르는 법을 배운 것이 아니라,
나를 조금 더 알게 되었다는 것을.
와인은 정답을 찾는 취미가 아니라
취향을 발견하는 여행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누군가에게 최고의 와인이
나에게도 최고의 와인일 필요는 없습니다.
오늘의 나와 가장 잘 어울리는 와인.
그 한 병이면 충분합니다.
그리고 언젠가 다시 와인 앞에 서게 된다면,
예전처럼 두려워하지 않으셨으면 좋겠습니다.
한 병 한 병은 시험 문제가 아니라
누군가 처음 건네는 인사와도 같으니까요.
천천히 바라보고,
마음이 머무는 곳으로 손을 내밀어 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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