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부해 간 건 상대 이야기를 다 듣고 나서 꺼냅니다
저는 준비만 많이 해 가면 미팅이 잘 풀리는 줄 알았습니다. 그래서 미팅 전날이면 상대 업계 이야기를 바카라이며 기사며 자료로 공부해 가는 편이었고요. 하지만 그게 전부가 아니라는 걸, 준비한 걸 언제 꺼내느냐에 따라 미팅이 완전히 달라진다는 걸 조금 늦게 알게 됐는데요. 혹시 예전의 저처럼 준비를 열심히 하시는 분이 있을까 싶어 그날의 기록을 꺼내어 공유드립니다.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준비는 충분히 하되, 제가 준비한 내용을 입으로 꺼내는 건 상대 이야기를 다 들은 다음에 해야 합니다.
1.
한번은 미팅 초반에 참석하신 분에게 전날 오랫동안 공부해 간 업계 현황을 차례로 설명하고 있었습니다. 나름대로 잘 준비했다고 생각하며 열을 올리는데, 고객이 제 말을 툭 끊고 꽤 공격적으로 말씀하셨습니다. "그 이야기는 저희도 다 아는 내용인데요." 이 업계에서 10년째 일하고 계신 분이었으니,
제가 바카라과 자료로 요약해 간 이야기가 오히려 얄팍한 지식처럼 느껴지셨던 것 같습니다.
순간 저는 눈치껏 설명을 멈추고 슬그머니 노트북에서 손을 떼었습니다. 준비한 말을 더 얹는 대신, 그분의 이야기를 끝까지 듣기로 했습니다. 중간에 끼어들지 않고 고개를 끄덕이면서요.
한참을 말씀하시던 그분이 나중엔 먼저 분위기를 풀어 주셨습니다. 제가 좀 과하게 정색했던 것 같다고요. 그 뒤로 대화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흘렀습니다. 그분이 현장에서 진짜 어려워하는 게 뭔지, 제가 준비해 간 정형화된 자료에는 절대 없던 날것의 이야기가 그때부터 나오기 시작했거든요. 그날 미팅은 좋게 마무리됐습니다. 준비해 간 내용보다 그걸 잠시 내려놓고 들은 시간에서 얻은 게 훨씬 많았어요. 준비한 말을 잠깐 멈춘 것뿐인데, 그 덕분에 고객은 '설명을 듣는 사람'에서 '자기 이야기를 하는 사람'이 됐고, 저는 그분에게 정말 필요한 게 뭔지 알게 됐습니다.
돌아보니 저는 평소 일상에서도 비슷한 실수를 하고 있었습니다. 저는 바카라 읽는 걸 좋아하는데요. 좋은 문장을 만나면 누군가에게 자꾸 나눠 주고 싶어 하거든요. 한동안은 친구들이 고민을 꺼내면, 그 맥락을 다 듣지도 않은 채
"내가 읽은 바카라에 이런 이야기가 있더라" 하며 얄팍한 조언이랍시고 섣부르게 건네곤 했습니다. 좋은 마음이었지만 순서가 급했던 거죠. 그리고 친구가 실제로 원하는 것은 조언이 아니라 들어 주는 것일 수도 있으니까요.
오래 알던 친구가 그즈음 제게 해 준 말이 있습니다. 한 분야를 깊게 판 사람일수록 오히려 시야가 좁아질 수 있다고요. 그 말을 듣고 바카라을 대하는 태도가 좀 바뀌었던 것 같아요. 바카라은 그 저자가 겪은 상황에서 맞았던 '한 사람의 의견'일 뿐이고, 제 앞에 있는 사람에게 그대로 맞는다는 보장은 없다는 걸요. 하물며 현업에서 몇 년을 살아온 고객 앞에서는 오죽했을까 싶었습니다.
2.
그 뒤로 미팅에서 지키려는 게 하나 생겼습니다. 준비는 충분히 하되, 꺼내는 건 상대 이야기를 다 들은 다음에 하자는 거예요. 고객이 궁금한 건 제가 공부해 간 뻔한 업계 일반론보다는 '당신의 사정을 내가 제대로 알아들었는가' 하는 점이더라고요. 같은 자료라도 먼저 꺼내면 잔소리가 되고, 듣고 나서 꺼내면 맞춤형 해답이 되는 것 같아요.
그래서 요즘은 준비한 자료를 버리지는 않고 말하는 순서만 바꿉니다.
상대의 말을 듣는 동안 제 노트 오른쪽 칸에 적어 둔 준비 내용 중, 그분의 사정에 딱 맞는 것만 골라 두었다가 대화 끝부분에 한두 개만 꺼냅니다.
미팅 준비 노트도 두 칸으로 나눠서 가져갑니다. 왼쪽 칸에는 그분께 여쭤 볼 질문을, 오른쪽 칸에는 제가 공부해 간 내용을 적습니다. 미팅이 시작되면 무조건 왼쪽 칸(질문과 경청)부터 채워 가고, 오른쪽 칸은 대화 중에 겹치는 핵심 키워드에만 슬쩍 표시를 해 둡니다. 미팅이 끝날 때쯤 보면 표시가 붙은 건 두세 개뿐인데, 그 두세 개가 그날 가장 깊게 닿는 이야기가 되더라고요.
요즘 미팅에서 대화나 분위기가 조금은 날카로워진다 싶으면, 저는 일단 노트북이든 펜이든 붙잡고 있던 손부터 내려놓고 듣기 시작합니다. 준비한 이야기가 문득 떠올라도 먼저 "제가 잘 몰라서 궁금한 게 있습니다. 요즘은 어떻게 하고 계세요?" 하고 질문을 던져 상대의 패부터 확인합니다. 준비를 많이 하는 건 여전히 제 강점이라고 생각합니다. 다만 그 준비가 무기가 되려면, 상대 이야기를 다 들은 다음이라는 전제가 붙어야 하는 것 같습니다. 아직 많이 부족합니다. 더 개선해야겠지요.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