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고서를 열 번 돌려받고 깨달은 점

초안은 혼자 붙잡지 말고 빨리 보여 주는 것이 좋은 것 같습니다

by김도경 dkkim

저는 보고서를 혼자 잘 만들어서 내면 되는 줄 알았습니다. 하지만 그게 아니라는 걸 열 번 가까이 반려당하고 나서야 알게 되었는데요. 혹시 예전의 저처럼 문서를 혼자 붙잡고 계신 분이 있을까 싶어 그동안의 기록을 꺼내어 공유드립니다.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초안은 혼자 붙잡지 말고 빨리 보여 주고, 들은 대로 여러 번 고치면 됩니다.


1.

예전 일입니다. 저는 보고서 하나를 작성했는데요. 그 보고서로 상사에게 다시 써 오라는 말을 열 번 가까이 들었습니다. 고쳐서 다시 내면 또 돌아왔습니다. 몇 번째쯤부터는 솔직히 좌절했고, 한동안은 문제를 보고서 안에서가 아니라 상사의 성향이나 외부 환경 탓으로 돌리기도 했습니다. 그러다 남 탓은 그만하고 읽는 사람 입장에서 제 보고서를 다시 읽어 봤습니다. 그런데 읽을 때마다 문맥이 어색하고 자꾸 흐름이 끊기더라고요. 제가 아는 정보를 그냥 늘어놓기만 한 문서였고, 읽는 사람이 어디서부터 어떻게 따라오면 되는지는 어디에도 적혀 있지 않았습니다. 저는 내용이 다 들어 있으니 됐다고 생각했는데, 상사는 이게 실제로 '읽히는 문서'인지를 보고 있었던 거예요.

그런데 읽히는지 아닌지는 저 혼자서는 끝까지 알 수가 없더라고요.

결국 읽는 사람이 알려 줘야 알 수 있는 거였어요.


그래서 쓰는 방식을 바꿨습니다. 초안을 빨리 써서 상사에게 먼저 보여 주고, 피드백을 받은 대로 여러 번 고치는 쪽으로요. 그렇게 몇 번을 고치고 나서야 제 보고서가 조금씩 읽히기 시작했습니다. 그 무렵부터 부족하지만, 일 잘한다는 말도 가끔 듣기 시작했고요.


2.

하지만 한 번 깨달았다고 몸이 바로 따라오지는 않았습니다. 최근 결과 보고서를 쓸 때도 똑같은 실수를 반복했습니다. 정작 보고서 첫머리에는 '빠르게 계획하고 고치며 일해야 한다'고 적어 놓고는, 제 손에서 완벽하게 끝내겠다는 욕심에 누구에게도 보여 주지 않은 채 혼자 며칠을 붙잡고 있었던 겁니다. 완벽주의는 일을 더디게 만들더라고요. 주말 기획 모임에서 만난 한 온라인 게임인분이 제게 "머릿속 생각을 문서로 담아내는 게 너무 어렵다"고 털어놓으신 적이 있습니다. 그때 저는 아주 당연하다는 듯 이렇게 답해드렸어요. "완벽주의 성향이 있으면 시작하기 힘들다, 일단 쓰레기를 만든다는 생각으로 초안을 빨리 쓰고 거기서부터 고쳐나가면 된다"라고요. 어디서 들은 좋은 이야기라며 조언까지 덧붙였습니다.


그런데 전화를 끊고 돌아보니, 그 완벽주의 뒤로 숨어 초안을 붙잡고 있던 사람이 바로 저였습니다. 제 글에 직접 적어 둔 해답을, 입으로는 남 얘기하듯 전하고 있었던 거죠. 완벽한 초안을 내놓으려는 욕심이 성장의 가장 큰 걸림돌이 된다는 걸 뻔히 알면서도, 일이 조금 익숙해지면 또 한 번에 잘 해내고 싶어 버릇이 튀어나오는 듯합니다. (습관이란 참 고치기 어려운 것 같아요) 이 글을 읽는 분 중에도 폴더 어딘가에 아직 아무에게도 안 보여 준, 거의 다 된 문서가 하나쯤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제 경우엔 그게 정말 거의 다 됐는지는 늘 읽는 사람이 알려 주더라고요. 열 번 가까이 돌아온 그 첫 보고서도 그랬습니다. 되돌려 받을 땐 마음이 쓰라렸지만, 생각해 보면 상사가 제 부족한 글을 열 번이나 진지하게 읽어 준 것이기도 했으니까요.


백 장의 글은 열 장으로 줄일 수 있지만, 아무것도 쓰지 않으면 줄일 것조차 없더라고요. 초안은 그냥 시작일 뿐이고요.

그래서 초안은 빠르게 만들어 내고, 피드백을 받아 고쳐 나가면 되는 것 같습니다.


부족한 글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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