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백하게 말하려면 제가 먼저 정확히 알아야 했습니다
제가 뜻을 설명하지 못하는 단어는, 저를 조금도 있어 보이게 해 주지 않았습니다. 깨닫는 데까지 좀 오래 걸렸던 것 같습니다.
1.
"잠깐 여쭤봐도 될까요. 방금 그 말이 구체적으로 뭘 하자는 뜻인지 궁금해서요." 예전에 이전 온라인 게임에서 일할 때, 한 회의 중간에 제가 꺼낸 질문입니다. 그날은 함께 일하던 부서의 한 담당자분이 앞으로의 방향을 설명하는 자리였습니다. 그분의 설명은 매끄러웠습니다. 다만, 제가 느끼기에 문장마다 있어 보이는 단어가 들어 있었습니다. 듣고 있으면 뭔가 대단한 걸 하자는 느낌은 들었습니다. 그런데 제 머릿속에 그림이 하나도 그려지지 않았습니다.
저는 누가 말을 할 때 속으로 두 가지 생각을 붙들고 듣는 편입니다. 첫 번째로는 "그래서 결론이 뭐지?" 두 번째로는 "이 회의가 끝나고 내가 앞으로 어떤 행동을 해야 할까?" 이야기가 이리저리 흘러도 이 질문 2가지를 붙들고 있으면, 대개 흐름을 잃지 않습니다. 결론이 잡혀야 그다음에 뭘 할지도 정할 수 있으니까요. 그날은 끝까지 결론을 못 찾았습니다. 제가 못 알아듣는 건지, 원래 그림이 없는 건지 판단이 서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저는 그분께 물었습니다. "이 회의의 결론이 뭐예요?" "그래서 저희가 어떤 행동을 하면 좋겠다는 거죠?"
그분은 답을 하지 못하셨습니다. 지금 떠올리면 그 순간의 저는 참 오만했고, 예의가 없었던 것 같습니다. 솔직히 그분을 몰아세우려던 질문은 아니었습니다. 정말로 몰라서 물은 거였으니까요. 그리고 저는 그분이 부족한 분이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잘 해내고 싶은 마음이 앞서면, 설명이 장황해지니까요. 제가 그걸 아는 건, 제가 그래 왔기 때문입니다.
2.
슬롯에 나와 처음 일을 배울 때, 저는 영리해 보이고 싶었습니다.
아는 것보다 조금 장황하게 부연 설명을 했고, 쉬운 말 대신 그럴듯한 말을 끼워 넣었습니다. 그러다 한 고객사 담당자분께 이런 말을 들었습니다. "포장은 괜찮으니까, 그래서 뭘 하시겠다는 건지 분명하게 말씀해 주세요." 그 자리에서 얼굴이 화끈거렸습니다. 포장을 벗기고 나니, 제가 할 수 있는 말이 생각보다 적었거든요. 그때 처음 알았습니다.
짧고 쉬우며 담백하면서도 분명하게 말하려면, 길고 그럴듯하게 말할 때보다 준비가 훨씬 더 필요하다는 걸요.
그때는 서운했습니다. 돌아보면 일하면서 들은 말 중에 손꼽히게 고마운 말입니다.
그 뒤로도 버릇이 한 번에 고쳐지진 않았습니다. 있어 보이는 단어가 튀어나오던 날을 돌아보면 공통점이 하나 있었습니다. 그 일을 왜 하는지, 제가 한 줄로 말하지 못하는 날이었습니다. 일의 목적성이 흐릿하면 일의 방향성과 효율이 동시에 떨어지기 마련이죠. 요즘 저는 담백하게 말하는 걸 좋아합니다. 그런데 해 보니 담백하게 말하는 게 제일 어려웠습니다. 꾸미는 단어를 걷어 내면 제가 아는 것만 남습니다. 제가 모르는 부분도 그대로 드러납니다. 담백하게 말하려면, 말하는 내용을 제가 먼저 정확히 알아야 합니다.
3.
그래서 요즘은 보고를 올리기 전에 해 보려는 게 하나 있습니다. 문서에서 제일 있어 보이는 단어를 하나 고릅니다. 그리고 그 단어를 처음 듣는 사람에게 설명하듯, 한 줄로 풀어 봅니다. 풀리면 둡니다. 안 풀리면, 그 단어는 아직 제 말이 아닙니다. 막상 해 보면 안 풀리는 단어가 꽤 나옵니다. 그럴 때는 그 단어를 빼고, 제가 실제로 하려는 일을 동작으로 적어 봅니다. 예를 들어, "고객 경험을 고도화한다" 대신 "문의에 하루 안에 답한다". 무엇을, 언제까지, 누가. (참고 - 육하원칙은 가장 강력하면서도 정교한 사고법 중에 하나인 것 같습니다. 가장 많이 사용하는 것 같아요.) 그렇게 적고 나면 문장은 덜 멋있어집니다. 대신 읽는 사람이 되묻는 일은 줄었습니다.
남의 말에서 모르는 단어가 나올 때도, 요즘은 예전과 다르게 물어보려고 합니다. "그게 무슨 뜻이에요?" 대신 "제가 이해한 건 이런 뜻인데, 맞을까요?"라고요. 제 말로 한 번 풀어서 내밀면, 상대도 몰리는 느낌 없이 고쳐 줄 수 있습니다. 그러면 상대방이 틀렸으면 틀렸다고, 맞으면 거기서부터 이어서 말해 주십니다. 그날 회의실에서도 그렇게 물었으면 어땠을까, 가끔 생각합니다. 그분도 저의 질문에 답을 잇기가 조금은 편하셨을지 모릅니다. 그날 저는 질문은 했지만, 질문을 담백하게 하지는 못했습니다. 오히려 그분은 제가 쏘아붙인다고 느끼셨을 것 같습니다.
질문 하나도 담백하게 하려면, 제가 어디까지 알아들었는지 먼저 알고 있어야 했습니다. "하나도 모르겠다"는 질문이 되지 않았습니다. 어디까지 따라갔고 어디서 끊겼는지 말할 수 있어야, 상대도 그 자리부터 이어서 답할 수 있었습니다. 풀어 쓰다가 설명이 자꾸 길어질 때도 있습니다. 저는 그걸 제가 아직 잘 모른다는 신호로 봅니다. 정말 아는 건 짧게 말해도 빠지는 게 없더라고요.
사실 저는 이름 붙이는 걸 좋아하는 사람입니다. 이 연재에도 "진짜 납득", "반례", "격" 같은 이름을 하나씩 붙이고 있습니다. 그래서 더 조심하게 됩니다. 이름을 붙였으면, 누가 물었을 때 한 줄로 풀어 드릴 수 있어야 하니까요. 진짜 납득은 어떤 질문이 와도 답이 제 것인 상태. 반례는 제가 아직 모르는 곳을 알려 주는 표시. 격은 모른다고 말해도 무너지지 않는 것. (일터의 자존감인 거죠) 이 세 줄이 막히는 날이 오면, 그 이름부터 바꿀 생각입니다. 제가 아직 완전히 납득을 하지 못했다는 뜻이니까요.
1화에서 질문 하나에 막힌 날을 적었습니다. 돌아보면 제 말이 멈추는 곳은 대개 뜻을 제대로 모르는 단어 앞이었습니다. 누가 "그게 정확히 뭔데요?" 하고 한 번만 물어도 무너지는 자리요. 지난 화에서는 제가 모른다고 말한 이야기를 했습니다. 이번에는 반대편입니다. 제가 물었고, 상대가 답하지 못했습니다. 두 장면을 나란히 놓고 보면 결국 한 이야기 같습니다.
모른다고 말할 수 있었던 날에는, 있어 보이는 단어가 필요 없었습니다. 그리고 제가 그런 단어를 꺼내 들던 날은, 대개 모르는 걸 감추고 싶은 날이었습니다. 지금은 누가 물어 주면 솔직히 고맙습니다. 제가 아직 제 말로 못 바꾼 단어가 어디 있는지, 거기서 알게 되니까요.
ps. 이 글을 쓰면서도 있어 보이는 단어를 몇 개 지웠습니다. 계속해서 개선해 나가야 하는 부분인 것 같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