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재된 위험과 방지
베란다 유리창 너머로 비껴들던 가을 햇살을 등지고 거실로 돌아선 성준은, 방 한구석에 고요히 서 있는 스탠드형 선풍기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동네 골목 어귀에서 이웃의 다정한 손길을 거쳐 집으로 들여왔던 무료 나눔의 선물이었다. 오래 묵은 세월 탓에 모터의 힘이 떨어져 빠르게 돌지 못한다는 솔직한 설명이 쪽지처럼 따라붙어 있던 물건이었다.
그러나 실제로 코드를 꽂아 써보았을 때, 그 모자란 회전력은 성준에게 뜻밖의 아늑함을 안겨주었다. 버튼을 가장 강한 단계까지 꾹 눌러도 날개는 요란한 굉음을 토해내는 대신 산들바람처럼 나직하고 순한 숨결만을 살랑살랑 실어 날랐다. 더위에 지쳐 잠을 청할 때 침대 머리맡에 두고 밤새 틀어놓아도 아침에 피부가 차갑게 마르거나 머리가 지끈거리지 않는, 오직 성준만을 위해 맞추어 놓은 듯한 온화한 바람이었다. 손때가 타서 칠이 벗겨진 손바닥만 한 리모컨도 자다 깨어 손만 뻗으면 스르륵 바람을 멈출 수 있게 해 주던 소박하고 정다운 여름의 짝꿍이었다.
하지만 방 안을 맴도는 공기가 완연히 서늘해진 지금, 한 계절 동안 곁을 지켜준 사물을 정성스레 갈무리해야 할 때가 찾아와 있었다. 성준은 공구함에서 십자드라이버를 꺼내 들었다. 안전망 아래쪽에 단단히 물려 있던 작은 고정 나사를 조심스레 돌려 빼내고, 테두리의 걸쇠를 젖혀 앞쪽 보호망과 뽀얗게 먼지가 앉은 날개를 차례로 분리했다.
욕실 타일 바닥에 쪼그려 앉은 성준은 대야에 물을 받고 부드러운 중성세제를 풀어 풍성한 거품을 일으켰다. 부드러운 솔을 쥐고 날개 표면과 안전망의 촘촘한 창살 틈새를 결 따라 정성껏 문질렀다. 지난 석 달 동안 켜켜이 엉겨 붙어 있던 누런 먼지 막이 하얀 거품에 녹아내렸다. 샤워기에서 쏟아지는 시원한 물줄기로 거품을 말끔히 씻어내자, 본래의 맑고 투명한 플라스틱 표면이 뽀얗게 드러났다. 마른걸레로 큰 물방울을 훔쳐낸 뒤 햇살이 가장 오래 머무는 베란다 바닥에 부품들을 정갈하게 펼쳐놓고 서늘한 가을바람에 온전히 말렸다.
바람과 볕에 바짝 마른 부품들을 다시 챙겨 들고 거실로 돌아왔다. 모터 중심축에 뒷망을 맞추어 너트로 단단히 조이고, 날개를 끼운 뒤 둥근 앞마개를 반대 방향으로 단단히 돌려 고정했다. 마지막으로 앞쪽 안전망의 둥근 테두리를 맞대고 위쪽 걸쇠부터 차례로 눌러 딸깍, 딸깍 채워나갔다.
이제 먼지가 타지 않도록 얇은 비닐 커버만 씌우면 모든 정리가 끝나는 순간이었다. 하지만 테두리를 한 바퀴 훑어보던 성준의 시선이 하단 결합부의 어긋난 틈새에 머물렀다. 맨 아래쪽 걸쇠 하나가 제자리에 완전히 물리지 않은 것이다. 성준은 다시 선풍기의 날개 보호개를 빼어 다시 끼웠다. 초등학교 시절, 매미 소리가 창문을 뒤흔들던 무더운 여름날의 기억이 불현듯 수면 위로 떠올랐다.
누구나 경험한 적 있으리라. 선풍기의 날개 보호대 사이로 손가락을 넣었다가 맹렬히 돌아가는 선풍기 날개와 손가락이 맞닿아 본 경험이. 성준도 마찬가지였다. 어린 시절의 조그만한 손가락은 그 틈새 사이로 들어가기에 딱 맞은 크기였고, 호기심 많던 성준은 그 틈새로 손가락을 넣었다가 손이 베인 적이 있었다.
성준은 투명한 비닐을 씌워 선풍기의 목을 끈으로 여며 묶은 뒤 다용도실 깊숙한 선반 위에 정갈하게 갈무리했다. 그리고 잠깐 웃어본다. 베란다 창밖 허공에서 겪었던 낙하의 아찔함에 이어, 어린 시절의 흉터가 일깨워준 이 작은 기억은 멈추어 선 도구의 내면에 도사린 위험(Looming)을 직시하고, 작업이 완전히 끝나는 마지막 1초까지 안전의 긴장을 늦추지 않는 것만이 일상을 지켜내는 가장 단단한 방패임을 가르쳐주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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