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벌의 탐욕과 기후변화가 낳은 최악의 인재
1928년부터 1930년까지 중국 북서부와 화북 지방 일대로 대가뭄(중원 대기근)이 발생했습니다. 이 재난은 1950년대 후반 대약진 운동 시기에 발생한 대기근 이전까지 가장 치명적인 인구학적 영향을 끼친 자연재해로 기록됩니다.
가뭄의 직접적인 영향권에 놓인 인구만 약 5,700만 명에 달했으며, 극심한 식량 부족과 이로 인해 파생된 전염병으로 최소 300만 명에서 최대 1,000만 명에 이르는 인구가 사망하는 참상이 빚어졌습니다.
이 시기 지역 기상 기록에는 "봄부터 가을까지 비가 단 한 방울도 내리지 않았다"거나 "수개월 동안 강우가 전혀 없었다"는 절망적인 관측 내용이 반복적으로 등장하며, 이는 중국 북서부 지역의 농업 기반 시설이 완전히 파괴되었습니다.
그러나 내부를 살펴보면, 극단적인 가뭄만으로 이러한 사태가 일어난 것은 아닙니다. 1927년 장제스가 주도한 난징 국민정부가 수립된 직후, 펑위샹과 같은 군벌과 장제스의 싸움 중원대전 등이 농민들의 가혹한 세금과 수탈로 이어져 광범위한 기민(饑民)을 죽음으로 내몰았습니다.
더욱이 이 기근에 대한 국제슬롯의 대응은 이전의 재난 구호 역사와는 사뭇 다른 양상을 보였습니다. 1920-1921년 화북 대기근 당시 적극적인 개입으로 수백만 명을 구출했던 국제 구호 단체들은, 1929년 사태를 철저한 '인재'로 규정하며 대대적인 구호 활동을 거부하는 결정을 내리게 됩니다.
동아시아 하계 계절풍(EASM)의 변화와 장기 건조화 추세
1920년대 중국 대륙은 이미 강한 '돌연변이적 건조화 추세'를 보이고 있었습니다. 이 장기 건조화의 배경에는 태양 흑점 활동의 극대기와 극소기 사이에서 발생하는 거시적인 기상 주기 변화가 작용하고 있었으며, 이는 1928-1930년 사이의 다년간에 걸친 가뭄 발생 주기와 대체로 일치합니다.
보다 직접적인 원인은 동아시아 하계 계절풍(EASM) 시스템의 변화입니다. 1928년과 1929년 중국 동부와 서북부 지역은 몬순을 통해 내륙으로 진입해야 할 수분 공급망이 철저히 차단되면서, 중국 내륙의 기상 조건은 극도의 건조 상태가 되었습니다.
허난성의 사례를 공간적으로 분석한 연구에 따르면, 가뭄은 단순히 한 곳에 머물지 않고 유동적으로 변화했습니다. 1928년 봄과 여름에는 허난성 서부, 북부, 중부, 동부 등 거의 전역으로 재난이 팽창했고, 가을과 겨울에는 피해 면적이 허난성 서부로 일시적으로 수축했으나, 1929년 봄이 되자 다시 광범위하게 확산되는 '광범위한 확산 → 수축 → 재확산 → 수축'의 치명적 리듬을 반복했습니다.
이에 산시성과 간쑤성 일대의 1927년 가을과 겨울에는 비나 눈이 전혀 내리지 않아 토양 수분이 완전히 고갈되었고, 1928년 봄 파종이 원천적으로 불가능해졌습니다. 산시성의 농민들은 일 년에 두 번의 수확(2기작)을 기대하는데, 1928년부터 시작된 가뭄으로 인해 무려 '3년 연속 6기작(료, 料)'을 전부 망치는 전대미문의 사태를 맞이하게 됩니다.
극단적 기상 이변: 산홍수(山洪)와 이례적 한파
1928년 7월, 수이위안과 허난성 일부 지역에는 극심한 가뭄 중에 갑작스러운 국지성 폭우가 쏟아졌습니다. 수목이 말라죽고 토양이 모래처럼 부서져 내린 탓에 빗물을 머금어줄 생태적 방어막이 전무한 상태였습니다. 그 결과, 내리는 비는 고스란히 산홍수(Flash flood)로 돌변하여 황하강과 그 지류들의 제방을 붕괴시켰습니다.
"저지대가 완전히 물바다로 변하여" 가까스로 살아남아 있던 한 줌의 벼와 곡물마저 수몰되는 최악의 상황이 전개되었습니다. 여기에 더해 1929년 겨울에는 전례 없는 극한 한파와 폭설이 덮쳤습니다. 관중 평원을 비롯한 산시성 일대에서는 11월 초부터 사람의 정강이까지 빠지는 폭설이 열흘 넘게 내렸습니다.
음력 12월(이듬해 1월경)에는 극도로 추운 날씨 속에서 웨이허(Wei River, 渭河)와 펑허 강물이 2척(약 60cm) 두께로 꽁꽁 얼어붙어 짐승들이 얼음 위를 자유롭게 건너 다닐 수 있었습니다. 설상가상으로 정월 대보름 기간에도 엽전 크기만 한 폭설이 쏟아져 북부 산악 지대의 도로를 1장(약 3m) 높이로 막아버렸습니다.
백 년 넘게 자라온 석류나무와 감나무가 뿌리째 동사할 정도의 극한 추위는, 식량 부족으로 체지방과 면역력을 모두 상실한 기민들에게는 즉각적인 사형 선고였습니다. 당시 산시성 푸펑현을 비롯한 각지에서는 수많은 이재민의 손가락과 발가락에 동상을 걸렸고 심할 경우 동사했습니다.
1759년에도 산시, 간쑤 일대에 극심한 가뭄이 덮쳤으나, 18세기의 상대적으로 온난하고 양호했던 기후 조건과 청 왕조의 견고한 재정 기반, 그리고 체계적인 세금 감면 및 타 지역(허난, 산둥 등)에서의 곡물 비축을 통한 신속한 구호 덕분에 슬롯적 충격을 빠르게 완화할 수 있었다. 그러나 1928년의 서북 지역은 누적된 생태적 부채로 인해 이러한 자연적, 제도적 복원력을 모두 상실한 상태였습니다.
정치경제학적 파국: 군벌 통치와 인재
1927년, 장제스가 이끄는 국민혁명군이 북벌을 완료하고 난징에 국민정부를 수립하며 형식적으로 중국 통일이 완료되었습니다. 그러나 난징 중앙 정부의 실질적인 통제력은 동부 연안과 장쑤성, 저장성 일대에 국한되었고, 기근에 빠진 서북 및 화북 내륙 지역은 여전히 수십만 명의 사병을 거느린 유력 군벌들의 수중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이 시기 중국 국민당 내부에서도 장제스의 독재와 무력 지배에 반발하는 거센 야당 세력이 형성되었습니다. 정치적 분열은 군사적 충돌로 이어졌고 서북군의 지도자 펑위샹과 산시성을 지배하던 옌시산이 동맹을 맺었습니다. 결국 1930년 수백만 명의 병력이 충돌한 중국 근현대 최대 규모의 군벌 내전인 '중원대전'이 벌어졌습니다.
군벌들에게 제일 시급한 건 군자금과 보급품이었습니다. 서북군의 펑위샹 군대는 허난성과 산시성을 드나드는 모든 철도 화물에 100% 운송세를 부과했습니다. 이 관세와 화물 통제는 면화나 기타 수공예품을 재배하던 산시성 농민들의 시장 경제를 무너뜨렸으며, 군벌이 철도와 유통망을 틀어쥐고 극악한 세금을 매기면서 외부 식량의 반입은 철저히 차단 헸습니다.
구호단체들이 외부에서 식량을 들여오려 해도 군대가 교통로를 차단하거나 화물칸을 군수송용으로 징발해 버렸고, 그 결과 구호물자는 창고에서 썩어가거나 군인들의 군량미로 착복되었습니다.
서북 지역의 기아는 자금을 충당하기 위한 지방 군벌들이 농민들에게 수십 년 치의 토지세를 미리 납부할 것을 강요하는 선납세 제도로 심각해졌습니다. 이처럼 가혹하고 비정상적인 조세 부담은 농민들로 하여금 옥수수, 밀 등 생명 유지를 위한 전통 곡물 대신 부가가치가 압도적으로 높은 아편(양귀비) 재배하게 만들었습니다.
이러한 기형적 농업 구조의 개편은 지역의 식량 자급률을 0에 가깝게 만들었습니다. 풍년일 때는 양귀비를 팔아 타지의 곡물을 사 먹을 수 있었지만, 1928년 가뭄이 닥쳐 모든 농작물 재배가 망했고 군벌에 의한 교역망이 멈추자 농민들은 아사 상태로 직행했습니다. 이처럼 1928년 대기근은 기후와 군벌에 의한 인위적인 재난이었습니다.
이 기근으로 무려 5,700만 명이 영향을 받았으며 공식적인 통계 수집은 외면했기에 완벽한 집계는 불가능하지만 대략적인 예상은 가능합니다.
산시성(Shaanxi): 1928년 기준 1,180만 명에 달하던 인구 중 약 250만~300만 명이 아사하거나 전염병으로 사망했다. 전체 92개 현(縣) 중 무려 91개가 재난 지역으로 선포되었으며, 살아남은 600만 명 이상의 인구가 고향을 버리고 피난길에 올랐다. 당시 조사에 따르면 관중 일대의 농촌 주택 중 60%가 파괴되었고 수목의 70%가 고사했다.
간쑤성(Gansu): 피해 비율로만 보면 가장 참혹한 지역이었다. 재난 직전 약 700만 명에 달하던 인구 중 무려 250만~300만 명이 사망한 것으로 추산된다.
수이위안(Suiyuan) 구역: 재해민의 수가 138만 명에 달했는데, 이는 당시 수이위안 전체 인구의 절반을 훌쩍 넘어서는 수치였다.
허난성 (Henan): 수백만 명이 사망했을 것으로 추정되며 군벌 운송세 착취와 함께 가뭄 확산과 수축이 반복하며 피해가 막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