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1~1923년 소련(러시아) 가뭄 및 기근 2편
슈야 사태 보고를 받은 레닌은 굶주림으로 인해 대중이 교회에 무관심하거나 분노하는 "바로 지금이야말로, 우리가 99%의 성공 확률을 가지고 반동 성직자들과 부르주아들을 철저히 분쇄할 수 있는 유일하고 가장 유리한 시기"라고 단언했습니다.
그는 "이번 기회에 가능한 한 많은 반동 성직자들을 총살할수록 좋다. 그래야 그들이 향후 수십 년 동안 어떤 저항도 생각하지 못할 것"이라며 종교 지도자들에 대한 대량 학살을 노골적으로 지시했습니다.
이 지시에 따라 소비에트 당국은 기아 구제라는 대의명분을 앞세워 종교계에 철퇴를 가했습니다. 1922년 5월 모스크바에서 열린 공개 재판 결과 8명의 사제, 2명의 평신도, 1명의 여성이 교회 재산 징발에 반대한 혐의로 사형을 선고받았습니다.
1918년 혁명 이후 초기 5년간 총 28명의 주교와 1,200명 이상의 사제가 기근과 반혁명 혐의를 빌미로 숙청당했습니다. 정작 압수된 막대한 교회 재산 중 기아 구제를 위한 식량 구매에 쓰인 비율은 극히 미미했으며, 대부분은 당 간부들의 특권 유지와 붉은 군대의 무장, 권력 강화 장치로 은밀하게 유용되었습니다.
국제슬롯의 구호 작전과 인도주의적 개입
소비에트 정부의 철저한 언론 검열과 은폐 시도에도 불구하고, 참혹한 상황은 결국 국경을 넘어 전 세계로 타전되었습니다. 1921년 7월 11일 모스크바 총대주교 티혼은 요크와 캔터베리 대주교 및 뉴욕 주교에게 긴급 전보를 보내 "엄청난 수의 인구가 굶어 죽어간다"며 호소했습니다.
이틀 뒤인 7월 13일 막심 고르키는 프리드쇼프 난센과 게르하르트 하우프트만, 아나톨 프랑스 등 유럽과 미국의 "모든 정직한 사람들"을 향해 빵과 의약품을 간청하는 절박한 공개서한을 발표했습니다. 기근 구호에 있어 절대적이고 주도적인 역할을 수행한 것은 후일 미국 대통령이 되는 허버트 후버가 이끈 미국구호협회였습니다.
제1차 세계대전 직후 벨기에 등 유럽 전역에서 수천만 명을 먹여 살리며 인도주의의 거인으로 명성을 얻은 후버는, 고르키의 호소에 즉각 응답하여 라트비아 리가(Riga)에서 소비에트 정부와 협상을 지시했습니다.
초기에는 100만 명의 어린이를 구호하는 것이 목표였으나, 후버의 측근인 버논 켈로그 교수가 현지 조사를 통해 1,600만 명 이상이 기근에 노출되었음을 확인한 후, 작전 규모는 극적으로 확대되었습니다. 후버는 1921년 12월 22일 제정된 러시아 기근 구호법을 통해 미 의회로부터 2,000만 달러(현재 가치 수십억 달러 상당)의 특별 예산을 확보하여 옥수수와 밀 종자를 대량으로 투입했습니다.
절정에 달했던 1922년 8월경, ARA는 무려 1만 9,000개의 급식소에서 매일 1,050만 명에서 1,100만 명의 소비에트 시민에게 음식을 제공하는 기적을 연출했습니다. 구호는 식량에 그치지 않았습니다. ARA 의료부(Medical Division)는 티푸스, 콜레라, 장티푸스, 이질 등을 막기 위해 대규모 백신 접종 드라이브를 전개하여 치명적인 2차 질병 확산을 차단했습니다.
볼셰비키 지도부의 외세에 대한 경계와 이념적 마찰
볼셰비키 정권에게 ARA의 구호는 체제를 구원한 생명줄이었으나, 동시에 심각한 이데올로기적 모순이자 위협이었습니다. 후버는 명백한 반공주의자였으며, 레닌은 미국이 구호를 빌미로 자본주의의 '트로이 목마'를 심어 체제 전복을 꾀한다고 끊임없이 의심했습니다.
1921년 8월 리가 협상 당시 레닌은 정치국에 보낸 메모에서 후버를 "뻔뻔한 거짓말쟁이"로 비난하며 "매우 복잡한 게임이 진행 중이므로 정교한 기동이 필요하다. 후버의 개입을 엄격히 통제하여 그가 전 세계 앞에서 망신을 당하게 해야 한다"라고 촉구했습니다.
이러한 적대감 때문에 체카(Cheka, 비밀경찰) 요원들이 ARA 현지 사무실에 첩자로 침투하여 업무를 방해했고, 심지어 곡물 수송 열차를 고의로 지연시켜 최대 5만 명의 추가 아사자를 발생시키기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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