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1~1923년 소련(러시아) 가뭄 및 기근

세계대전 이후 소련에 가뭄과 정부 정바카라으로 인한 기근이 함께 덮쳤다.

by이월

약 500만 명에서 1,000만 명이 아사하거나 기아로 직접적인 타격을 받은 폼볼지에 기근은 그 당시 소비에트 당국에 위기로 다가왔습니다. 이 기근은 기후 변화뿐만 아니라 전쟁이라는 사건과 급진적인 경제 정바카라의 실패가 맞물린 복합적인 사건이었습니다.

1914년에 발발한 제1차 세계대전과 1918년부터 1920년까지 지속된 적백내전(Russian Civil War)은 러시아 제국의 슬롯경제적 기반을 초토화시켰습니다. 약 7년에 걸친 지속적인 전시 상황은 농업 노동력을 대규모 징집했고 이 기간 동안 700만 명에서 1,200만 명에 이르는 사망자가 발생했는데 이들 대부분은 농업 생산의 주축인 민간인들이었습니다.


상황을 더욱 악화시킨 것은 볼셰비키 정부의 급진적인 통제 경제 체제, 즉 전시공산주의 하에서 시행된 잉여농산물 강제 징발제였습니다. 소비에트 당국은 군대와 도시 노동자들을 부양하기 위해 농민들이 생산한 농산물을 무상으로, 혹은 인플레이션으로 가치가 전혀 없는 종이조각에 불과한 영수증만을 주고 강제로 압류했습니다.

이러한 국가 주도의 약탈적 징발은 농민들의 생산 의욕을 감소시켰으며 징발을 피하기 위해 농민들은 최소한의 식량만을 생산하는 담합을 실시했고 파종 면적을 의도적으로 축소했습니다.

당국의 치명적인 실수는 다음 해 농사를 위해 남겨두어야 할 종자용 곡물까지 강제로 징발한 것이었으며 이로 인해 1916년 7,400만 톤에 달했던 제정 러시아의 곡물 수확량은 1921년에 이르러 3,000만 톤으로 수직 추락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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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4년 에 발발한 제1차 세계대전과 뒤이어 1918년부터 1920년까지 지속된 적백내전(Russian Civil War)은 러시아 제국의 슬롯경제적 기반을 초토화시켰습니다. 무력 충돌 과정에서 볼셰비키(적군), 백군, 무정부주의자, 분리주의 민족 진영 등 모든 교전 세력은 군대를 부양하기 위해 농민들로부터 식량과 가축을 무자비하게 징발했습니다.

그 결과 농경지는 황폐해졌고, 징발된 가축의 빈자리는 농업 생산성을 급감시켰으며, 수백만 명의 인구가 강제 이주되거나 유랑하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국가 주도의 약탈적 징발은 농민들의 생산 의욕을 감소시켰고 자신들이 수확한 잉여 곡물이 모두 국가에 의해 몰수당한다는 사실을 학습한 농민들은, 징발을 피하기 위해 오직 자신과 가족이 연명할 수 있는 최소한의 식량만 생산했습니다.


이러한 상황은 1921년 봄과 여름, 러시아와 우크라이나에 가뭄이 덮치며 단순한 식량 부족 사태를 넘어 질병, 대규모 난민 사태 등의 상황이 연달아 나타났습니다 기근 지대에 갇힌 3,000만~3,500만 명의 인구는 동쪽 시베리아나 기차가 다니는 주요 거점 도시로 피난길에 올랐습니다.

특히 피난민들이 대거 몰려든 카잔(Kazan), 사마라(Samara) 등 주요 거점 도시의 병원과 고아원은 순식간에 포화 상태가 되었습니다. 콜로라도 주지사의 아들이자 미국구호협회(ARA) 요원이었던 윌리엄 샤프로스의 기록에 따르면, 카잔의 한 고아원에는 부모에게 버림받은 아이들이 "물개 서식지처럼 서로 촘촘하게 엉겨 붙어" 죽어갔으며, 사마라에서는 단 3개의 방에 283명의 어린이가 수용되어 이가 들끓는 환경에서 영양실조로 매일 수십 명씩 목숨을 잃었습니다.

기아의 극한 상황: 식인 풍습

1921년 겨울을 지나며 봄과 여름에 비축해 둔 식량이 바닥나자 농민들은 가축을 도살했고, 이내 개, 고양이, 쥐마저 모두 잡아먹었습니다. 이후에는 잡초, 나무껍질, 점토, 심지어 지붕의 짚을 빻아 동물의 뼈와 섞어 먹으며 연명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대체물조차 고갈되자 생존자들은 묘지를 파헤쳐 시신을 훼손하고 인육을 섭취하기 시작했습니다.

끔찍하게도 사체를 먹는 것에 그치지 않고, 산 사람을 살해하여 인육을 확보하는 범죄 갱단이 출몰했습니다. 가장 연약하고 방어 능력이 없는 어린아이들이 표적이 되었습니다. 해가 진 후 거리에 나간 아이들은 갱단이나 심지어 이웃에 의해 납치되어 살해되었고, 그들의 인육은 시장에서 소고기나 말고기로 위장되어 암거래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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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비에트 정부와 농민 봉기

강제 징발과 그로 인한 아사에 분노한 농민들은 곳곳에서 무기를 들고 소비에트 정권에 항거했습니다. 가장 대표적인 봉기는 탐보프 지역에서 슬롯혁명당원 알렉산드르 안토노프의 지휘 아래 5만 명에 달하는 농민 게릴라군이 결성된 사건이었습니다. 이와 유사하게 서시베리아 등지에서도 "공산주의 타도! 소비에트 만세!"라는 구호 아래 농민 무장봉기가 들불처럼 일어났고, 한때 국가 영토의 상당 부분이 모스크바의 통제를 벗어났습니다.

농촌의 분노는 식량 배급이 끊긴 도시 노동자들의 대규모 파업으로 이어졌으며, 1921년 3월에는 볼셰비키 혁명의 가장 강력한 전위대이자 상징이었던 크론시타트 해군 기지의 수병들마저 무장 반란을 일으켰습니다.

신경제정바카라(NEP) 도입

체제가 내부로부터 붕괴할 수 있다는 공포에 직면한 레닌은 1921년 3월 제10차 공산당 대회에서 전시공산주의의 종식을 선언하고, 경제 노선의 극적인 전환인 신경제정바카라(NEP)을 전격 도입했습니다.

NEP의 핵심은 농민의 숨통을 조이던 강제 곡물 징발제를 전면 폐지하고, 이를 예측 가능한 형태의 현물세(Prodnalog, Tax in kind)로 대체하는 것이었습니다. 농민들은 정해진 세금만 납부하면 남은 잉여 농산물을 자유 시장에서 판매하여 이윤을 남길 수 있게 되었습니다. 또한, 소규모 민간 산업의 탈국유화와 외국 자본의 유치 등 자본주의적 요소를 대거 허용했습니다.

이는 볼셰비키 강경파들에게는 공산주의의 본질을 훼손하는 뼈아픈 "퇴보"로 받아들여졌습니다. 레닌 스스로도 1921년 10월 정치교육부 대회 연설에서 "우리는 경제 전선에서 심각한 패배를 겪었으며, 정면 돌파 대신 전략적 후퇴를 선택해야만 했다"라고 고백하며, 이를 "나중에 두 걸음 전진하기 위해 한 걸음 물러선 것"이라고 항변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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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제 공고화를 위해 이용된 기근의 정치화와 억압

아사가 걷잡을 수 없이 퍼져나가자, 외부의 원조를 끌어와야 했던 정부는 평소 부르주아라 칭하며 억압하던 지식인들에게 손을 내밀어야 했습니다. 자유주의 및 문화계 명망가들이 주도하는 굶주린 자들을 구호하기 위한 전러시아 위원회가 모스크바에서 결성되었고 이 위원회는 국내외에서 자금 모집과 구호 활동에 착수했습니다.

그러나 공산당 외부에서 자율적이고 독립적인 시민슬롯가 형성되는 것을 극도로 혐오했던 레닌은, 이 위원회가 기근 구호를 매개로 대안적 반정부 정치 세력으로 성장할 것을 편집증적으로 우려했습니다.

결국 1921년 8월 말, 정부는 구호 협상을 앞두고 기습적인 법령을 내려 위원회를 강제 해산시켰으며, 쿠스코바, 프로코포비치, 키시킨 등 주요 인사들을 반혁명 혐의로 체포하고 투옥한 뒤 유배형에 처했습니다.


기근은 오랫동안 볼셰비키의 눈엣가시였던 러시아 정교회의 권력을 박탈할 수 있는 전략적 도구가 되었습니다. 1918년 소비에트 정부는 교회, 학교 등을 국유화하려고 시도했으나 실패했었습니다. 1921년 기근이 심화하자, 구호 식량을 구매할 외화가 부족하다는 명분 하에 1922년 2월 23일 전국의 모든 교파 교회로부터 금, 은, 보석 등 귀금속을 의무적으로 압수하는 교회 귀금속 압수령을 공포했습니다.

이에 대해 모스크바 총대주교 티혼은 2월 28일 서한을 통해 자발적 기부가 아닌, 전례(Liturgy)에 사용되는 신성한 성물까지 국가가 강제로 강탈하는 행위를 신성모독으로 규정하고, 1922년 봄 전국 각지에서 시위가 발생했습니다. 가장 치명적인 유혈 사태는 슈야(Shuya)에서 벌어졌는데 귀금속 압수를 막으려는 신자들이 기관총을 난사하며 4명이 사망하고 다수가 부상을 입었습니다.

2편에서 계속